이경미 감독이 학교와 아웃사이더를 그려내는 법: <비밀은 없다> <미쓰홍당무>
보이지 않았던 세계
<비밀은 없다>에는 세 겹의 세계가 있다. 가장 겉면에 위치하여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바로 종찬으로 대표되는 경상도 정치인들의 세계다. 뉴스와 각종 작품에서 자주 만났던 이 세계는 가장 현실적으로 그려지며 뒤에 나올 두 세계와 대조되는 ‘리얼리티의 세계’다. 민진이 실종되면서 이 세계에 포함되어 있던 연홍의 세계가 갈라져 나온다. 잘 나가는 아나운서이자 신예 정치인의 살뜰하고 야무진 부인으로 잘 섞여 들어 보이던 허상이 벗겨지고 고립된 이방인으로서의 연홍이 정체성이 드러나면서 그만의 ‘혼돈의 세계’를 구축한다. 혼돈의 세계는 연홍의 혼란스러운 상태를 일컫는 동시에 그 세계의 불완전함을 뜻한다. 혼돈의 세계는 콘트라스트를 높여 보이지 않던 흠과 굴곡까지 모두 드러난 이미지와 같이 보인다. 연홍은 종찬의 세계에서 민진의 세계로 이동하며 영화의 동력을 만들어내며, 그럴수록 점차 자신만의 주체성을 찾아가며, 민진의 장례식에서 마침내 각성한다. 영화의 중반 이후 연홍을 따라가며 만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영화의 가장 내부에 위치한 민진과 미옥의 세계이다. 민진의 실종이 아니었다면 영영 드러나지 않았을 둘의 세계는 과거의 것이자 나머지 두 세계에 파동을 만들어낸 사건의 근원지이다. 앞선 두 세계와 대조되게 이 세계는 느린 호흡과 푸른색이 섞인 뽀샤시한 톤으로 동화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뮤직비디오와 같은, 그리고 실제 뮤직비디오 형식으로 보여주는 둘의 가장 찬란한 시간과 깊은 숲 속, 찔레꽃 밭 한가운데 위치한 아지트에서 보이는 로케이션, 아기자기한 소품 역시 이러한 분위기를 만드는데 일조한다. 둘의 세계는 쉽사리 닿지 않는 ‘환상의 세계’다. 모든 비밀이 밝혀지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있다. 민진이 영화 속 현재 시점으로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 연홍과 종찬이 선거 유세를 나가 혼자 집에서 그네를 타고 있던 민진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스마트폰으로 11시 20분이 된 것을 확인한 뒤 확신에 찬 발걸음으로 집을 나선다. 그때 흥얼거리던 노래는 바로 지니와 오기의 Wild Rose Hill. 해당 곡의 가사를 통해 11시 30분이 바로 중요한 거래의 시간임을 알게 되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그러나 그건 밤 11시 30분으로 민진이가 집을 나선 낮과는 12시간의 공백이 있다. 일부러 스마트폰 액정 속 시간을 보여 준 것은 그저 그 시간을 한 번 더 강조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민진이의 열두 시간. 어른들은 모르는 청소년들만의 아프고도 아름다운 세계가 존재하는 시간. 가장 중요한 세계는 바로 거기에 있다는 뜻이라고 나는 해석했다. 실제로 우리는 민진의 실종이 (당연히) 정치인들의 음모로 인한 것이라고 믿다가 점차 비밀이 밝혀지며 영화가 예상치 못했던 곳으로 흘러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결국 이 모든 파국을 부른 것은 민진과 미옥의 작당이었다. 시험지를 요구하고 돈을 뜯어낼 만큼 영악하지만 1억이라는 근거 없는 금액과 대통령에게 유서를 쓸 만큼 순수한(멍청한) 이들의 세계는 외부로는 어마어마한 파국을 부를 만큼 파급력이 있지만,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이 세계에 눈길을 주었던 사람은 없다. 폐쇄적인 학교 내 두 명의 아웃사이더의 연대, 혹은 합심은 이경미 감독의 전작 영화 <미쓰 홍당무>와 시리즈물 <보건교사 안은영>에서도 느슨하게 반복된다.
몰개성의 사회와 개성 강한 아웃사이더
특히 <미쓰 홍당무>와 <비밀은 없다>의 경우 ‘왕따’ 두 명이 합심하여 복수(혹은 사랑, 혹은 같은 것)라는 공통의 목표를 향해 비뚤어진 방식으로 나아가고 가족에게 크고 작은 파국을 부른다는 점에서 거의 같은 구조를 보인다. 전자가 아웃사이더의 관점에서 진행된다면 후자는 파국을 맞은 가족의 관점에서 과거를 추적해나간다는 시점의 차이가 있다. <보건교사 안은영> 역시 특수 능력으로 인해 평생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은영과 다리 장애라는 일종의 결핍과 창립자의 손자라는 지위로 특정되어버린 인표가 합심해 학교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구해나가는 이야기이다. 각 작품에서 둘의 연대는 가족에게서 등을 돌리게 만들 정도로 강력하다. <미쓰 홍당무>에서 모든 사실이 밝혀지는, 청각실 5자 대면이 이루어지는 절정에서 한 때 종희-서 선생-성은교 대 양미숙-이유리로 만들어졌던 대결 구도는 결국 종희와 미숙이 손을 잡고 달려 나가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비밀은 없다>의 민진 역시 자신이 떠나면 혼자 남겨질 미옥을 위해 돈을 요구한다. 각 커플 사이에 은근한 지위 차를 설정한 부분이 재미있다. 미숙-종희는 선생과 제자라는 실질적인 지위 차이가 있으며 민진-미옥은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딸이라는 심리적 지위 차이를 가지고 있다.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인표-은영 역시 학교의 주인과 고용인이라는 사회적 지위 차가 존재한다.) 거칠게 보자면 각 페어의 관계는 외부의 요인으로 인한 지위 차를 상관하지 않는 사이이기도 하다. 민진과 미옥은 조안 페이를 좋아하는 공통의 취향으로 엮였고 미숙은 병원에서 나이 차이는 우정에 영향이 없으며 자신이 종희와 얼마나 쿵작이 잘 맞는지 “커진다 커진다 커진다”를 통해 열렬히 설명한다. 사회적인 시선을 이겨낸 개인의 승리. 애초에 이들이 아웃사이더가 된 이유 또한 사회에 섞여 들기에는 개성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미쓰 홍당무>에서 학교의 이미지는 방송으로 나오는 교장 선생님의 명상 지도를 모두가 따라 하는 장면으로 요약된다. 화면에서 보이는 한복을 입고 잔머리 하나 없이 빗어 하나로 묶은 머리를 한 교장 선생님의 외모와 명상을 이끄는 느릿하고 차분한 목소리는 프로파간다 방송이나 종교적 이미지로 보이기도 한다. 비슷한 장면이 <보건교사 안은영>에서도 반복된다. 겨드랑이를 치며 “내 몸이 좋아진다”라고 주문을 외우는 아침 체조와 다 함께 큰 소리로 웃음을 만들어내는 장면은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원작이 있는 해당 작품에서 이러한 학교의 묘사는 원작에는 없는, 추가된 시선이다. 학교의 모든 선생과 학생들은 이를 기이할 정도로 잘 따라 한다. 오직 양미숙만이 “하란다고 다 해요?”라고 말하며 반기를 들고 곧 다른 선생들에게 묵살된다. 학교는 몰개성의 전체주의적 공간이고 이를 따르지 못하는 사람은 아웃사이더가 된다. 양미숙 선생은 러시아어가 더 이상 인기가 없기 때문에 고등학교에서 중학교 영어 선생님이 된, 변화하는 트렌드에 의해 떠밀려 난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다. 이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반복되는 그림이다. 종희는 반 아이들이 다 함께 준비하는 장기자랑에서 모두가 멘 리본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야기를 했다가 쫓겨난다. 애초에 학교 내 인기 선생님의 딸이었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 지나치게 튀고, “재수 없는” 존재로 낙인찍혀 있었다. 민진 역시 마찬가지다. 잘 나가던 아나운서 출신이자 신예 정치인의 딸인 민진. 게다가 어릴 때 미국에 살다왔다는 이유로 영어를 섞어 쓰는 그는 다른 학생들 사이에서 튀는 존재였을 것이다. 미옥의 입을 통해 “원래부터 재수 없는 애였다”라고 설명된다. 양미숙의 첫사랑 이야기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으며 학생들은 그에게 “우리 학교에서 가장 인기가 없다”라고 말한다. <미쓰 홍당무>와 <비밀은 없다>의 주인공들은 몰개성의 공간에서 지나친 개성으로 배척받는 존재들이다.
이경미 영화 속 캐릭터의 특징
아웃사이더 간의 연대는 꼭 학교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동시에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그때만큼 친구가 중요하고 가족과 멀어지는 시기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학교 내 왕따들 간의 연대는 이경미 감독의 영화 속 특수성이라기보다는 아웃사이더 간의 연대를 그리기에 학교가 아주 적합한 배경이었다는 게 맞을 것 같다. 군대를 제외하면, 어쩌면 가장 전체주의적인 공간에서 가장 감수성 짙은 시간을 보내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개성 강한 캐릭터를 가지고 개성 강한 작품을 만들기에 아주 적합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학교가 지닌 특유의 폐쇄성은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세계를 더욱 비밀스럽고 특별한 것으로 만든다. 마치 경찰이 절대 등장하지 않는 픽션 속 범죄자들의 세계 같다. 두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야 학교 밖의 사람(학부모)은 이들의 관계를 ‘발견’한다. 연홍과 은숙은 자신의 딸이 왕따라는 사실을 듣고 같은 표정을 짓는다. 나는 이것이 부모의 무심함을 보여주려 한 것이라기보다는, 민진과 종희의 강단을 강조하기 위함이라 생각했다. 영화 속 아웃사이더가 자신이 당하는 괴롭힘에 대해 괴로움을 토로하는 장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아무도 원하지 않아도 어떻게 해서든 단체 사진에 나오기 위해 ‘날아오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들과는 대조되는 예쁘고(잘생기고), 인기가 많은 선생님 캐릭터의 공통점이다. 손소라 선생과 이유리 선생은 민진과 종희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아빠와 관계를 맺은 가정 파괴범이고 예쁜 가면을 벗겨내야 할 악의 대상이다. 잘생인 원어민 선생 맥켄지 역시 순수하지 않은 목적을 가지고 학교에 접근한 악당이다. 결과적으로 이유리 선생은 서 선생과 자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해피 엔딩을 맞았고 손소라 선생은 종찬과 잤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 서선생인 척 채팅으로 이유리 선생에게 접근해 학교에서 영문을 모르는 서 선생 앞에서 수모를 당하게 하는 장면이나, 공기청정기로 위장한 몰래카메라로 촬영한 비디오로 손 선생을 협박하는 방식은 이들의 섹슈얼리티 자체를 처벌하는 느낌이 든다. 한창 섹슈얼리티를 발견해나가는 시기의 청소년들(그리고 한 명의 성적으로 덜 성숙한 성인). 섹슈얼리티로 인해 그들에게 벌을 받는 성인들. 이들 간의 나란한 배치가 흥미롭다. 또한 이는 주인공들이 결코 ‘선한’ 캐릭터는 아님을 보여준다. 부족한 구석이 많은 이들이 주체적으로 비뚤어진 방식을 선택해 직접 복수를 행하기 때문에 사건이 벌어지고, 일이 부풀려진다. 그 누구도 온전히 좋아하기 어렵고, 또 싫어하기도 어려운 것이 이경미 영화 속 캐릭터들의 특징이다.
부족함을 끌어안는 방법
부족한 캐릭터가 부족한 캐릭터의 손을 잡는다. 둘은 개성을 지워낸 학교에서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둘만의 세상을 만들어낸다. <미쓰 홍당무>의 마지막, 종희와 미숙은 장기자랑 무대로 향한다. 부끄러워하는 미숙에게 종희는 “나는 하나도 안 창피하한데 왜 그러냐”고 외친다. 그러자 미숙 역시 당당하게 무대로 오른다. 던져지는 휴지, 각종 오물을 맞으며 둘은 꿋꿋하게 대사를 외운다. 학생들의 야유 소리는 점차 멀어지고 둘은 그저 뿌듯한 표정으로 무대를 만끽한다. 뽀샤시한 화면의 톤은 이들을 예쁜 뮤직비디오처럼 그린다. 이 장면은 <비밀은 없다>에서도 반복된다. 지니와 오기는 오물을 뒤집어쓴 채 노래를 이어나간다. 하지만 이번에는 녹화된 장면을 연홍이 보고 있다. 연홍이 본 그들의 모습은 그저 안쓰럽고 그들의 곡은 이상했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듯, 그는 옆자리 학생에게 왜 지니와 오기의 팬이냐고 묻고 학생은 대답한다. “야들 얘기는 바로 제 얘기거든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지니와 오기의 아지트를 때려 부수던 연홍은 복수를 이루고 결국 민진과 미옥의 세계로 들어선다. 거기에는 설명과 해명이 아닌 공감과 연대가 있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끌어안은 그 모습처럼, 감독도 작품을 통해 그저 이들의 부족함과 뾰족함을 끌어안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짐작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