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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즈&이어즈> 숨가쁘게 변화하는 세상, 그리고 트랜스 휴먼

monglim 2021. 4. 8. 17:51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잦은 야근과 스트레스로 뒷목은 뻣뻣해지고 팔다리는 천근만근인 날들이 지속되면, 확실히 몸뚱이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 아니 그뿐인가. 가시지 않는 편두통으로 도저히 집중하기 어려울 때, 암만 진통제를 들이부어도 생리통이 사라질 줄 모를 때, 내일이 없다는 듯 마신 대가로 숙취에 시달리며 물 한 모금 넘기기도 괴로울 때… 계속해서 나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 몸이 아쉽고, 통제되지 않는 생리현상이 불편했던 적도 많다. 먹고 마시고 배출하고. 먹어서 찌우고 움직여서 다시 빼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꾸만 고장 나고 삐그덕 대는 부분을 관리하고 고치고. 육체라는 것은 정말 많은 노력과 수고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영원히 고장 나지 않는 몸을 바라는 것이 20세기 출신 사람의 상상력이다. 베서니는 한 차원 더 나아간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육체성이 싫었고, 때로는 공기가 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고 말한다. 그는 궁극적으로 육체를 버리고 데이터로 존재하는 “트랜스 휴먼”이 되고 싶다. 트랜스 휴먼이라니, 대체 그게 뭐야.

처음 <이어즈&이어즈>를 봤을 때, 가장 놀라웠던 장면 중 하나가 바로 베서니가 부모에게 커밍아웃을 하는 장면이었다. 이 부분의 연출이 좋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익히 보던, 퀴어로서 커밍아웃을 하는 장면과 유사하게 보여주면서 그가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이모티콘 마스크 뒤에 숨는 모습이 단지 사춘기 때 지나가며 느끼는 한 때의 감정이 아님을 알려준다. (커밍아웃할 때 많은 대화의 포인트는 정체성의 문제이지 “한 때 지나가는 감정”이 아님에 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겹을 덧씌운다. 베서니의 부모 스티븐과 셀레스트는 베서니의 인터넷 검색 기록을 보고 그가 트랜스젠더라고 짐작하고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다 받아들이고 사랑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들은 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깨어있는 부모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고 후세대는 이들이 깨어나는 속도보다 앞서 나간다. 베서니는 말한다. 트랜스젠더? 아니에요. 나는 트랜스 휴먼이에요.

이 장면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은 따라잡기 힘겨운 속도로 변화하며, 하나의 개념에 적응할 때쯤이면 금세 새로운 개념이 나와버리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단 여섯 화로 급속도로 흘러가는 세월을 보여주는 드라마 <이어즈&이어즈>의 주제와도 맞닿아 있다. 동시에 이 장면으로 인해 지금도 한창 진행 중인 트랜스젠더에 관한 “논란”이 얼마나 금방 낡아버릴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나와는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사람들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 이름이 알려진 분들의 잇따른 죽음이 불과 몇 주 전의 일이다. 하긴, 영국의 유명 작가가 한 말들로 다양성을 존중하는 태도로 사랑받던 시리즈에 금이 간 것도 얼마 전의 일이니 꼭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매체 안에서 소수자를 다루는 올바르고 "세련된" 태도와, 현실에서 소수자를 대하는 폭력적이고 "촌스러운" 행동 사이 바로 그 이격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전에는 아주 강력한 외부의 (혹은 새로운) 적이 나타나면 내부의 (혹은 이전의) 갈등은 자연스레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를테면 외계인의 침공을 받으면 비소로 국가, 인종 간의 갈등이 사라진다든지. 하지만 국가 간 전쟁이 난다고 해서 국내의 분쟁이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사회적 강자와 약자 간의 격차가 더 벌어지듯, 이제는 그러한 생각이 이상적 환상에 가깝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매체 속 새로운 개념이 나타나는 속도와 현실에서 이를 받아들이는 (저항하는) 속도의 차이는 어떻게 줄여나갈 수 있을까. 이러한 실질적 고민을 해본다.

<이어즈&이어즈>의 강렬함은 바로 여기에서 온다. 시리즈가 처음 방영된 2019년에서 시작해 한 화당 몇 년씩 흘러가며 변화하는 세계를 보여주는데, 먼 훗날 혹은 저 멀리 어딘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많은 SF물과는 달리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사회와 바로 맞닿아있는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 사이의 갈등, 여전히 이어지는 러시아와 중국의 독재 정치, 폭주하는 트럼프 정권 하의 미국, 하나둘씩 통제를 잃어가는 유럽의 정부들, 점점 심각해지는 기후 변화와 풀리지 않는 난민 문제. 6화에서 도는 전염병은 바로 일 년 뒤인 2020년에 비슷하고 훨씬 더 끔찍한 형태로 지구를 강타했다. 트럼프가 연임에 실패하면서 우리의 세계는 드라마와는 갈라진 평행우주에 온 것 같기는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조금씩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라는 것이 생생하게 실감된다. 1화는 미국이 중국의 인공 섬 홍사도에 핵폭탄을 떨어뜨리면서 끝난다. 전쟁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고 사람들은 패닉 상태에 빠져 숨거나, 종말에 대한 두려움에 이상하게 들뜨거나, 대니처럼 진실의 순간을 맞으며 그를 막고 있던 사회적 금기를 내던지고 함께 있고 싶은 사람에게 달려간다. 그렇게 세상은 끝나는 것 같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2화의 시작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크게 달라진 것 없는 세상이다. 가족의 할머니 뮤리얼이 “홍사도에 폭탄이 떨어졌을 땐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지!”라고 한 말에서 SNS상에서 우연히 스친 글귀가 생각났다. 세상의 종말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하루 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오랜 시간에 걸쳐 온다고.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의 전기를 끊든 말든, 키예프, 예멘, 카타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말건 “신경 조또 안 쓴다”라고 말하는 정치인. 세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문제들 대신 집 앞의 쓰레기가 잘 수거되고 주차 문제가 해결되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눈 앞의 작은 것으로 돌린다. 거침없는 입담, 남다른 쇼맨십에 넘어간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웃음거리 취급받던 비비안 룩은 점차 영국 정치의 주요 인물이 되고, 나아가 국무총리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세상은 점점 나빠지며 주인공들은 크고 작게 영향을 받는다. 스티븐과 셀레스트 가족은 은행이 파산하며 전재산을 잃고, 로지는 일자리를 잃고 점차 변두리로 밀려나며, 대니는 남자 친구 빅토르가 추방되자 그와 함께 살길을 도모하다 목숨을 잃는다. 점차 하락세를 걷는 이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에디스와 베서니다.

에디스는 체제 밖에서 존재하며 체제를 부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홍사도가 폭발할 때 그곳에 있었던 사람. 행동하는 사람. 뮤리얼 할머니가 이렇게 세상이 나빠진 것은 너희 모두의 책임이라고 말하며 던지던 비난의 화살에서 유일하게 벗어난 사람이다. 그렇다면 베서니는? 인류의 다음 스텝, 트랜스 휴먼이 되고 싶어 하는 베서니는 후세대의 상징이다. 시리즈의 초반 부모 앞에서조차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며 숨고 싶어 하던 베서니는 점차 몸을 개조시켜나가며 자신감을 찾는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는 어느새 가족의 리더가 된 듯 그들을 이끈다. 방사능 피폭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 에디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그의 죽음을 이야기하던 베서니. 모두가 서서히 지쳐가는 얼굴을 할 때 유일하게 점점 밝아지는 그는 하강하는 가족과 사회에서 유일하게 상승하는 사람이다. 시리즈의 마지막에서 베서니와 에디스가 손을 잡으며 혁명을 일으킨다. 에디스의 행동력, 대의를 향한 정의감. 트랜스 휴먼이 된 베서니의 "연결되는" 능력. 결국 둘은 긍정적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서로가 필요했던 사람들이다. 위험해 보이기도 하는 베서니의 능력을 긍정적으로 사용하게 이끈 것은 에디스다.

그래서인지, 결국 먼저 데이터화 되는 길을 가는 것도 에디스다. 이전까지 에디스가 베서니를 이끌었다면, 이제는 베서니가 자신의 세계로 에디스를 이끄는 것이다. 현 체제에서 목소리를 내며 싸우던 사람. 그리고 미래로 나아가는 사람. 에디스와 베서니가 가는 길이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일까? 끝없는 전쟁, 기후 변화, 전염병과 재난 사이에서 인류의 선택지는 진화라고 <이어즈&이어즈>는 제시하는 걸까? 앞서 나는 신체의 한계를 생각하며 트랜스 휴먼이란 육체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몸에 각종 칩과 센서를 심은 베서니가 기뻐한 포인트는 세상과의 동시적 연결성이었다. 그러니까 트랜스 휴먼은 육체를 극복하기보다는 초월하는 것에 가깝다. 이제는 나의 상상의 범주를 벗어나버렸다. 에디스가 데이터화에 성공한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일까? 스파이크 존스의 영화 <그녀>에서 사만다와 어떻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여전히 "휴먼"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일론 머스크의 뉴럴 링크 기사를 보며 눈 깜짝할 새에 미래가 현실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거부감이 든다고, 낯설다고 해서 외면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세상은 언제나 나보다 빠르게 변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