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타 거윅 <레이디 버드> <작은 아씨들> 우리를 만들어낸 시간들
개인적인 트리비아를 먼저 얘기하며 시작해보자면, 나는 <레이디 버드> 개봉 당시 중국에서 영화를 관람했다. 새로 오픈한 영화관의 거대하고 푹신한 소파와 무릎 담요를 놓아주는 세심함, 관람객들 사이의 편안한 거리와 반짝이는 인테리어에 감탄하며 들어가서 “부적절한” 장면을 뭉텅뭉텅 잘라버린 영화를 보고 혼란스러워하며 나왔다. 후에 친구에게 영화는 전반적으로 좋았지만 중간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고 (예를 들자면, 크리스틴의 첫 남자 친구 대니가 다른 남자와 화장실 부스에서 키스를 하는 장면이 잘려있었고 나는 남자 화장실로 뛰어들어가는 크리스틴과 줄리의 모습 직후에 차에서 울음을 터뜨린 둘을 보았다) 그제야 영화의 공식 러닝타임에서 시간이 부족한 것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유튜브 클립으로 잘려나간 몇몇 장면을 찾아보고 나름대로 퍼즐을 맞춰보았다. 이번에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관람하고 나서 나는 (당연하게도) 영화가 훨씬 더 좋아졌다. 물론 스토리라인에 문제를 일으켰으니 (아니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더라도) 영화를 마음대로 잘라버리는 것은 화가 나는 일이지만, <레이디 버드>는 작은 순간들이 삶을 풍성하게 만들고 한 사람의 성장을 만들어나가는 것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영화이기에 잘려나간 장면들이 더욱 안타까웠다.
떠나야만 하는 크리스틴
그렇게 처음 보게 된 장면 중 하나는 가장 좋았던 장면 중 하나이기도 하다. 크리스틴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에 대니가 사과를 하러 찾아온다. 크리스틴은 배신감에 대니에게 화가 나 있는 상태이다. 크리스틴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감정이다. 대니는 크리스틴에게 완전히 솔직하지 않았고, 크리스틴과 연애 중인 상태에서 다른 남자와 있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대니가 비밀을 지켜달라고 하며 아직 커밍아웃을 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울음을 터뜨리자 바로 화를 누그러뜨리고 그를 안아준다. 크리스틴은 엄마의 말대로 "자신만 아는 애"에서 자신의 상처보다 더 큰 고민이 있는 상대를 보로 그를 끌어안는다. 크리스틴은 대니와 영원히 함께하는 이상과 대니가 실은 성 정체성을 발견 중에 있으며 그와의 연애는 끝이 났다는 현실 간의 차이를 받아들이면서 성장한다. 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부딪히며, 상처 주고 상처 받으며, 스스로를 찾아 나가는 중이다. 살고 싶은 파란 집 대신 "기찻길의 잘못된 쪽"에 살고 있다는 말로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을 이상한 애라고 생각하는 제나 무리와 어울리려다 절친 줄리를 멀리한다. 동시에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카일과, 카일 때문에 별 수 없이 그와 놀아준다는 제나에게 상처를 받는다.
영화는 크리스틴을 중심으로 흘러가면서도 나이 든 프로그래머인 아버지 래리와 좋은 대학을 나왔지만 제대로 된 직장을 얻지 못한 오빠가 같은 직장을 두고 면접관에서 마주쳤을 때의 표정, 선생님을 좋아하는 수줍은 줄리의 마음, 병원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만 연극 지도부 선생님과 엄마 마리온의 위로를 포착하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이는 크리스틴은 보지 못하지만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들이다. 크리스틴은 대부분의 청소년이 그러하듯, 자기중심적이다. 하지만 그는 조금씩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타인을 이해하는 쪽으로 변한다. 졸업 댄스를 가지 않겠다는 카일과 제나 무리에 말없이 따르는 대신 자기는 가고 싶다고 의견을 피력한다. 줄리와 함께 졸업 댄스에서 신나는 시간을 보내고, 제나에게 자신의 진짜 집을 보여주고, 카일이 자신의 남자 친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대니와 줄리의 공연에서 박수를 보낸다. 크리스틴은 이상을 추구하며 상처 주는 대신, 현실을 받아들이며 성장해간다. 그러나 그중 가장 중요한 이상을 이룬다. 크리스틴은 가장 큰 꿈이자 영화의 목표 지점인 뉴욕으로 떠나는 데 성공한다.
크리스틴이 뉴욕으로 가는 것은 중요하다. 뉴욕은 많은 할리우드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 꿈의 상징이자 동경의 대상으로 나왔으며 마침내 그곳에 다다랐을 때 주인공을 혹독하게 현실로 내모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코요테 어글리>류의 영화에서 수많은 주인공들이 뉴욕으로 떠나 그곳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그리고 꿈을 이루기도 한다.) 하지만 <레이디 버드>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뉴욕에 도달하는 것이 아닌, 새크라멘토를 떠나는 것이다. 새크라멘토는 바로 크리스틴이 거부하고 싶은 모든 현실의 중심에 있는 근원적 존재, 엄마 마리온을 상징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틴이 뉴욕 행 비행기를 타러 가는 길. 마리온은 자신에게 말도 없이 뉴욕의 대학에 지원해서 합격한 딸을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는 크리스틴을 공항에 내려주고 차에서 내리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크리스틴이 공항으로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후회하는 마리온은 눈물을 흘리며 차를 돌린다. 마리온의 시점 쇼트로 공항에 돌아오는 장면에 흐르는 슬픈 음악은 비행기에 탑승해 창 밖을 내다보는 크리스틴의 시점 쇼트에 깔린 신나는 비트의 음악과 대조된다. 자신만의 새로운 인생의 시작점으로 향하는 자녀 세대의 상승감과 삶의 후반부에 다다른 부모 세대의 대비되는 모습에서 영화 <보이후드>의 엔딩이 떠올랐다. 대학에 진학해 새로 만난 친구들과 산에 올라 앞으로 다가올 인생에 대한 기대감을 표하며 삶의 정점에 서 있는 듯한 소년의 모습은 살다 보면 인생에서 무언가 더 있을 줄 알았다며 허무감에 빠진 엄마의 이미지와 대비된다. 한 소년의 성장을 길게 들여다보았던 영화가 그 시간이 동시에 한 여자의 인생이 저물어가는 것이기도 했음을 보여주며 이야기가 확장되는 장면이다. 그러나 <레이디 버드>는 크리스틴이 희망찬 앞날로 향하는 모습을 통해 마리온과 대비하며 이야기를 끝내는 대신 크리스틴을 다시 새크라멘토로 돌려놓는다. 뉴욕이라는 목표지점을 향해 달려온 영화는 마침내 뉴욕에 도착해서 문득 뒤를 돌아본다.
영화의 유일한 회상 장면이다. 크리스틴은 엉망진창이 된 모습으로 끔찍하게도 싫어했던 성당에 홀린 듯 들어가서 성가를 듣다가 나와 엄마에게 화해의 전화를 한다. 크리스틴은 수화기에 대고 운전을 하게 되어 새크라멘토의 거리를 달리며 드디어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들여다보았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이때 크리스틴이 기분 좋게 운전하는 모습은 마리온의 운전하는 모습과 교차된다. 이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한 차의 앞좌석에 나란히 앉아 서로에게 화를 내던 모녀의 모습과 대조되는 대칭을 이룬다. 엄마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타 있던 크리스틴은,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한 단 하나의 몸부림으로 달리는 차 안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택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와서 스스로 마리온의 자리인 운전석에 앉아 마침내 그를 이해해 본다. 결국 크리스틴은 성장하기 위해서 엄마에게서 분리되어 (새크라멘토를 떠나) 자신만의 삶을 개척해야 (뉴욕으로 가야) 했던 것이다. 엄마에게서 벗어나야 하지만, 떠나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화해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관계로 발전해야만 온전한 성장을 이루게 되는 모녀의 복잡한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장면이다. 이는 성장 영화로서 <레이디 버드>를 가장 도드라지게 하는 부분이자 한 (여성) 청소년의 성장에서 가족(그리고 친구들) 간의 관계를 깊게 들여다보는 그레타 거윅 감독만의 시선이 돋보이는 지점이기도 하다. 한 소녀가 가족과 친구들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는 이야기를 섬세하게 들여다봄으로써 중요함을 부여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차기작인 <작은 아씨들> 역시 같은 결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그레타 거윅이 <프란시스 하>부터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이다.
돌아와야 하는 조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은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성인이 되어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자매들의 모습을 더욱 비중 있게 그려냈으며 현재와 과거가 교차되는 방식으로 진행해 나간다. 워낙 유명하며 여러 번 리메이크된 작품이고, 또 과거와 현재의 톤을 달리해 도움을 주고는 있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는 편집 방식을 굳이 택했다. 이를 통해 보이는 효과 중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과거와 현재가 맞닿은 채로 변주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영화는 비슷한 장소와 상황을 배열하며 과거와 현재를 넘나 든다. 그렇게 교차되던 두 개의 타임라인이 마침내 모이는 시점은 조가 로리의 청혼을 거절하고 뉴욕에 간 선택을 한 것을 후회하는 와중에 그러한 선택이 부른 결과 (로리와 에이미의 결혼)을 확인하게 되는 지점이다. 또한 병에 걸린 베스를 두 번째로 간호하며 애초에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하다가 결국 베스를 보내고 마는 시점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조에게 상실감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조가 네 자매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조의 책이 제본되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다시 그 장면으로 돌아와 끝을 맺는 영화는 조가 작가로서의 꿈을 향해 가기까지 그를 만든 크고 작은 사건들을 책이라는 하나의 목표 지점까지 배열한다. 메그와 에이미가 조가 쓰고 있는 이야기에게 요즘에는 무엇을 쓰냐고 묻자 조는 처음으로 자신 없어하는 모습을 보이며 우리의 인생 이야기를 쓰고 있지만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라 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 답한다. 그때 에이미는 아무도 그러한 이야기를 적지 않았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게 보이는 것이라며, 그것에 대해 적는 순간 중요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에이미는 이들의 성장기가 책으로 쓰일 가치가 있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교차해 하나의 책으로 모이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책을 영화의 중심부에 놓음으로써 “너무 사소해서 관심을 가질만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던 네 자매의 인생이 이야기되어야 하는 이유를 편집을 통해 역설해낸다.
영화는 두 가지 결말을 보여준다. 조와 교수가 재회해서 이어지는 하나의 결말이 있고, 조가 마치 고모의 집을 물려받아 학교를 여는 또 하나의 결말이 있다. 이를 영화의 두 가지 다른 버전의 결말로 볼지, 하나는 책의 결말이고 또 하나는 영화의 결말로 볼지, 혹은 앞선 결말과 뒤의 결말이 이어지는 것으로 볼지는 관객의 선택이다. 앞만 보고 달려가던 <레이디 버드>의 크리스틴과 달리 조는 현재를 붙잡고 싶어 하는 캐릭터다. 메그의 결혼식 날 자신과 도망가서 배우를 하자고 진심으로 얘기하는 조는 현재 가족들의 상태도, 로리와의 관계도 변함이 없기를 바란다. 그런 조는 크리스틴과 달리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어있다. 그리고 고향에서 네 자매의 이야기를 글로 써내서 과거를 정리하고 마침내 미래로 나아간다. 크리스틴이 뉴욕으로 떠나 다시 새크라멘토를 회상하면서 성장했다면, 조는 집으로 돌아와 글을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조망하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보여준 결말은 조가 쓴 책의 결말이기도 하다. 그 후에 우리가 본 두 번째 결말은 조가 아직 겪지 않은 미래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요약하자면, 영화는 조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과거를 글로 써냄으로써 성장했고 이제 자신이 쓰는 대로 (결정하는 대로)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고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는 그레타 거윅 감독이 조에게 준 가장 힘차고 희망찬 결론이 아닐까.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소한 것과 중요한 것.
<작은 아씨들>의 초반, 조는 편집자가 자신의 글의 “불필요한 부분”을 펜으로 죽죽 그어 지우는 것을 본다. 그렇게 지워져 나간 페이지들은 <레이디 버드>에서 구겨진 채 버려진 마리온의 실패한 편지들 같다. 래리는 마리온이 끝내 완성하지 못한 페이지들을 주워 크리스틴에게 전달한다. 잘 쓰인 한 장의 편지보다 미완성된 몇 장의 구겨진 편지가 당시 마리온의 마음을 더 잘 대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성숙한 시간이라고 해서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사소하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레타 거윅의 영화는 그렇게 이야기한다.
카일과의 첫 경험 후 들떠있는 크리스틴에게 카일은 자신은 처음이 아니었으며 이미 여러 번 다른 사람들과 잔 경험이 많다고 얘기한다. 특별했으면 했던 경험이 산산이 무너져버려 좌절한 크리스틴에게 카일은 난데없이 이라크 침공 후 몇 명의 민간인이 죽었는지 아냐고 묻는다. 그런 그에게 크리스틴은 말했다. "전쟁 말고도 슬픈 일은 많아."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것, 마땅히 이야기되어야 할 것을 정하는 것이 작가의 일이자 작품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레타 거윅은 에이미의 입을 빌려 말한다. 이야기해야 할 것을 적는 것이 작품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누군가가 작품으로 쓰는 순간 중요해지는 것이라고. 사소하고 개인적인, 소녀가 성인이 되어가는 문제. 그것 또한 중요한 문제라고, 감독은 그에 대한 영화를 여러 편 찍으면서 이야기하고 있다.
누군가는 그레타 거윅의 영화들이 너무 소시민적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아니 그렇게까지 얘기하지는 않더라도, 좋아하는 상대와 함께 첫 경험을 겪지 못한 소녀의 좌절과 사람이 죽어나가는 전쟁을 나란히 놓는 것은 문제적이라 볼 수 있다. 앞선 문제가 전쟁, 기아, 난민의 문제만큼 중요하다는 것인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러한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카일의 태도와 그 대화가 벌어지는 상황이다. 그는 크리스틴에게 첫 섹스라고 했던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밝히며 상처를 주었고 그것이 별 것 아니라는 말을 하기 위해 “큰 문제”들을 꺼냈다. 우리는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 꼭 좋은 행동을 하는 사람은 아님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아왔다. 입으로는 정의로운 이야기들을 하며 행동으로는 주변에 상처를 주는 권력자들은 많았다. 그것은 “해일이 몰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라는 말로 이야기되기도 하였고, 심지어는 인권 변호사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칭했던 사람조차 뒤로는 약자이자 여성에게 가해했던 사실이 반복적으로 밝혀지는 것을 지켜보아 왔다. 카일은 우리가 수없이 봐온 말하는 "정의의 사도"의 표본이며, 여기서 영화가 짚는 것은 문제를 말하는 태도이지 문제의 경중이나 우선순위의 비교는 아니다.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는 일이다. 가깝든 멀든 간에, 어두워서 미처 시선이 가지 못했던 곳에 조명을 비추어 그것을 바라보게 한다. 그레타 거윅은 세상의 절반이 겪어왔지만, 충분히 (혹은 정당하게) 다뤄지지 않았던 여성 청소년들의 성장에 집중한다. 나도 겪은 일이지만 나조차도 중요한 줄 몰랐던 일들. 분명히 좋았지만, 나도 함께 열광하고 싶었지만, 왜인지 그렇게 되지 않았던 많은 성장 스토리에 (<월플라워>, <파수꾼>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데미안>, <상실의 시대>까지) 왜 나는 그만큼 감동하고 이입하지 못할까 생각했었다. 그레타 거윅(과 근래에 나온 젊은 한국 여성 감독들)의 영화들을 보고 나서는 마음 한구석이 시원하게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평범한 나의 성장도 이렇게 이야기될 구석이 많다는 것, 나의 상처도 추억도 특별하면서 동시에 보편적이라는 것을 일깨워준 영화들에 특별한 애착을 품고, 이기적이고 부족했던 과거의 기억들과 함께 마음 깊은 곳에 담아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