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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국제를 가는 마음

monglim 2021. 10. 6. 16:42

영화를 좋아하는 일은, 실은 그리 쉽지 않다. (다른 류의 공연, 혹은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듣는다면 비웃겠지만 말이다) 두 시간 남짓 하나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은 꽤 많은 에너지를 요한다. (스트리밍 시대, 숏폼 콘텐츠가 유행하는 시대에 영화는 왜 점점 더 길어지는지) 예능, 유튜브, 드라마는 밥을 먹거나 소일거리를 하며 느슨하게 대할 수 있지만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밥을 먹으면서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가벼운 코미디, 킬링 타임용 액션 영화라면 팝콘이나 감자칩 정도는 허용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 <고스트 스토리> 같은, 적막해서 더더욱 사운드가 중요한 영화를 보며 스스로가 과자를 씹는 소리를 듣는 것은 끔찍하다. <그린 나이트> 같이 한 순간의 미장센도 놓칠 수 없는데 자막이 없이는 스토리를 따라가기도 어려운 영화에서 잠깐씩 눈을 뗀다고 생각해보라. 끔찍하다. 왜 쓸데없이 진지하냐고 묻는다면, 좋아하니까.

 

스스로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설명하고 나면 또 하나의 관문이 생긴다. <꼭 봐야 하는 명작 100선>, <20세기 최고의 영화들>, <아카데미 수상작…> 리스트가 쌓여간다. 시대별 고전들을 헤쳐 나가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현시대의 화제작도 보아야 한다. 좋아하는 감독이나 배우가 생기면 그 사람의 필모를 죽 훑어야 하고, 또 그 사람에게 영향을 준 사람의 필모도 훑어야 하고… 과제가 무거워질수록 외면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보고 싶어요”를 눌러놓은 영화 리스트에 스크롤을 내렸다 올리며 오늘은 어떤 작품에 삘-이 오는지 고민하다가 기운이 다 빠져버리고, 결국 생각도 집중도 필요 없는 연애 리얼리티 예능으로 도피하고 만다. 그러니까 영화를 좋아해서, 영화를 보지 못한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아니 정확히는 영화관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동의할 거라 생각한다. 영화관의 큰 화면, 빵빵한 사운드, 가득 찬 관객의 기운이 주는 동요도 좋지만 영화관의 강제성에 기대는 마음이 있다. 일단 불이 꺼지고 나면 별 수 없이 앞에 흘러가는 화면에 집중해야 한다. 엄청나게 급한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이 영화가 생각보다 별로여도 오늘 나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까지는 앉아 있게 된다. 도중에 일시 정지를 누르고 화장실에 다녀올 수도 없으며, 궁금한 게 생겨도 검색창을 켤 수 없다. 그렇게 끝까지 보고 나야만 온전하게 하나의 영화를 경험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보수적인 마음을 지킨다. 왜 쓸데없이 진지하냐고 묻는다면, 좋아하니까.

 

올해에는 나와 영화의 (일방적) 관계에 위기가 왔다. 모두가 겪은 팬데믹이 가져온 변화도 있지만, 그것보다 큰 원인은 반려견이 생긴 것이다. 나의 귀엽고 사랑스럽고 똑똑하고 기특한 반려견 봉구. 봉구가 온 뒤에 생활이 많이 바뀌었다. 일단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가야 하고, 근무 시간 외의 시간은 가능하면 함께 보낸다. 외출을 하게 되더라도 되도록 강아지가 가능한 곳으로 함께 다닌다. 영화관에 가는 숫자가 자연스레 줄어든 것은,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해지고 영화관은 반려동물 출입이 되지 않는다는 당연한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도 관심사가 옮겨 갔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집에 동물이 있는 사람은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그냥 가만히 숨을 쉬고 있는 모습만 바라봐도 시간이 잘도 흐른다. 실내에서 한 번도 지내본 적이 없는 ‘스트리트견 봉구’가 우리 집에 와서 실내살이에 적응하고, 소파의 안락함을 깨닫고, 하루에 한 번씩 출근했다가 돌아오는 인간을 기다리고, 신기할 정도로 급속히 마음을 열어 나를 첫 번째 존재로 생각해주는 변화가 재미있고 너무너무 기뻐서 이 대단한 생명체의 놀라움에 비해 그만, 영화는 조금은 평면적으로 느껴지고 만다.

 

애정하는 김혜리 기자님도 비슷한 말을 SNS에 쓴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나만의 고민은 아닌가보다. 나보다 훨씬 깊고 넓게 영화를 사랑해온 분도 하는 생각이니까.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전해지는 그 어떤 경이로운 화면, 아름다운 이야기도 당장 내 눈 앞에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세계, 4차원의 생명체를 이길 수는 없다는 생각. 내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강아지의 온기를 느끼며 이전이라면 하지 않았을 생각을 한다.

 

그래서, 그럼에도, 그러니까 더더욱, 부산국제영화제에 간다. 여전히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그 마음을 확인하고 싶은 집착으로. 부국제는 약 7-8년 전부터 스스로의 연례행사로 만들어 매년 참석하고 있다. 대체로 혼자 가는데, 친구들도 비슷한 성향인 덕분에 내려가면 늘 만날 사람이 한둘은 있었다. 서로 보는 영화가 겹치기라도 하면 굉장히 반갑고, 아니어도 해운대 근처 영화관 사이를 바쁘게 오가다가 짬이 나면 하이파이브라도 하며 스친다. 물론 일정이 다 끝나면 함께 술을 마신다. 서로 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일정이 나오면 일단 숙소부터 예약해둔다. 어차피 숙소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지 않기 때문에 되도록 해운대 쪽에 가깝고 실용적이며 깨끗한 숙소가 좋다. 미리 예매권을 사고, 상영작이 공개되면 시간표를 짠다. 이번에는 결코 욕심내지 않고 하루에 두 편만 보겠다는 다짐은 시간표를 짜는 동안 서서히 옅어진다. 썸네일 몇 컷, 한 단락의 글로 설명되는 영화들은 너무나도 매력적이다. 깐느를 통해 공개된 화제작도 잡고 싶고, 평소에는 접하기 힘든 아시아의 젊은 감독들을 만나는 지적 허영심도 채우고 싶고, 단단하고 놀라운 한국의 독립 영화를 발견해서 그 감독 마치 내가 키운 양 떵떵거리고 싶다. 극영화는 물론이고 괜찮은 다큐멘터리와 기왕이면 애니메이션도 넣고 싶다. GV가 있는 상영회차로 잡고 싶다. 그러다 보면 3박 4일 스케줄이 너무 짧고 하루는 꽉 들어차버리고 만다. 하루 네 편씩 다 보고 싶은 욕망을 겨우 누르고 하루 세 편씩 사나흘을 채우고 나면 예매 당시에는 뿌듯하고, 영화제 기간에는 죽을 맛이다. 하루 세 편의 영화를 보는 것은 꽤나 체력이 드는 일이다.

 

영화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렇게 제한된 정보로 만나게 되는 보석 같은 영화들 때문이다. 영화제에 간 사람은 영화를 선택할 때 한층 더 과감해진다. 영화관에서는 아무래도, 집에서 스트리밍으로는 더더욱, 도전하지 못했을 영화를 시도하고 (때로는 원래 예매하려던 영화에 실패해서 차선으로 택해서) 마음에 영영 자국을 남기는 그런 작품을 만나게 된다. 썸네일이 예쁘다는 이유 하나로 골랐던 <행복한 라짜로>, 그리고 실은 어쩌다가 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는 <셀프-포트레이트 2020>이 그랬다.

 

<행복한 라짜로>는 2018년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났다. 초록빛 나뭇잎 가운데에 선 소년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컷이 르네상스 풍의 유화 같기도 하고 동시에 인스타 감성 컷 같기도 했다. 눈을 끄는 썸네일의 이탈리아 영화. 두 정보만 가지고 골랐는데 썸네일의 매력이 상당했는지 당시에 부국제에 간 나의 다른 두 친구도 비슷한 이유로 같은 영화를 골랐다고 했다. <행복한 라짜로>는 영화제에서 만나기에 완벽한 영화였다. 사전 정보가 없을수록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후에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열풍이 불었을 때, 나는 이 영화가 떠올랐다. 전반부와 후반부에 전혀 다른 경험을 주는 영화.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관객을 끌고 나가는 영화. <기생충>이 찝찝한 여운을 남기며 현실의 한중간에 관객을 앉혀두고 끝을 맺는다면, <행복한 라짜로>는 현실을 초월한 상승감에 올려두고 마무리된다. 인간들의 세계에서 신을 엿보고 나온다.

 

이동우 감독의 <셀프-포트레이트 2020>은 약 1년간 나를 영향력 아래 두었던 강렬한 영화였다. 강렬하려고 애쓰지 않았는데, 애쓰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나도 강렬했다. 투박하게 빚어낸 거친 소주같은 영화에 취해버린 나는 2020년의 부국제에 다녀와서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에게 시도때도 없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 했고 영화를 함께 본 사람이 더 없다는 것에 답답함을 느꼈다. 작은 카메라 하나를 가슴에 달고 다른 이의 삶, 보지 못했던 세상에 깊숙이 들어가 찍어낸 화면 속 혼란에서, 나는 내가 딛고 서 있던 어떠한 기반 같은 것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고 내가 알던 세상의 왜곡을 비로소 보게 된 것 같았다. 견고하다고 믿었던 나의 세상이 살얼음판 위임을 깨달아버린 위태로움이 그 안에 있었다. 계획되지 않았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대사, 우연한 장면의 주술에 무너져 내렸다. 술 한잔을 걸치며 나누던 무엇을 위해 사냐는 물음에, “혹시나. 혹시나 해서 살아”라는 대사는 지금도 저릿하게 가슴 한 켠에 머물러 있다. 영상자료원의 강의에서 남다은 평론가가 주목하고 있는 감독으로 이동우 감독을 언급했을 때 내적 반가움으로 홀로 춤을 추었다. <셀프-포트레이트 2020>은 영화제였기 때문에 만날 수 있었던 날카로운 기쁨이었다. 후에 <노마드랜드>를 보면서 이 영화를 다시금 떠올렸고,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고, 가능하다면 <소공녀>까지 엮어서 누군가와 긴 대화를, 혹은 나만의 서투른 글을 써보고 싶은 희망을 조용히 간직하고 (미뤄두고) 있다.

 

올해에도 부국제를 간다. 팬데믹 덕이라고 해야 할지, 여름휴가를 가지 못해 남아있던 연차를 부국제 기간에 맞춰 그 어느 때보다도 길게 가지만, 반려견과 애인과 함께 가기에 많은 욕심을 버리고 하루에 1-2편의 느슨한 스케줄을 짰다. 처음으로 부산 여행도 해볼 예정이다. 애인에게 휴가를 함께 맞추자는 다소 이기적인 제안을 하며, 영화 예매 시기 전에 엑셀 표에 3안까지 짜 놓은 스케줄표를 공유하며, 상대가 나를 다소 또라이(?)로 생각하고는 도망가버리지는 않을지 걱정이 많았다. 보고 싶은 영화만 수십 편 추려놓은 엑셀 표에서 야무지게 딱 하나를 고른 애인을 위해 일곱 편 중 한 편만 2매 예매를 해서 가는 부산. 내가 영화를 보는 동안 다를 기다릴 강아지와 애인에 대한 양심은 있어서 GV는 포기한 부산. 컴컴한 영화관의 눅눅한 냄새보다는 시원한 바닷바람의 짠내를 조금 더 누리게 될 부산. 올해의 부산은 조금 다르고 아마도, 여전히, 좋을 예정이다. 올해에 만나게 될 보석들을 기대하는 마음이 두둥실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