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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수원의 철학자, 안소니 호프, The Philosopher in the Orchard, Anthony Hope
    옮긴 글/과수원의 철학자, 안소니 호프 2016. 11. 6. 20:40

    *원문 링크: http://www.online-literature.com/anthony-hope/3874/

    *소설이 쓰인 정확한 연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안소니 호프는 Sir Anthony Hope Hawkes의 필명으로 1863년에 출생해 1933년에 사망하였습니다.

     

    따뜻하고 온화한, 기분 좋은 날이었다. 과수원 너머로 햇살이 드넓게 비추었고 그늘 밑은 선선했다. 옅은 바람이 불어와 철학자가 기대앉은 나이 든 사과나무 가지를 흔들었다. 철학자는 이러한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바람이 무릎 위 두꺼운 책의 페이지를 넘겨버려서 읽던 곳을 다시 찾을 때나 비로소 날씨 따위를 알아챌 것이다. 그러면 바람에 대고 항의하며, 페이지를 찾을 때까지 훑다가 다시 글에 몰입할 것이다. 책은 존재론에 관한 논문으로, 철학자의 친구인 다른 철학자가 썼다. 오류로 가득해서 철학자는 이를 모두 찾아 책 끝 여백 페이지에 메모하는 중이었다. 그는 (마치 그럴 것 같은 행동과는 달리) 서평을 쓸 의도가 없었고, 자신의 저서에서 이 책을 언급할 생각도 없었다. 단지 수준 이하의 오류를 낱낱이 밝혀 박제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꼈다. 

    그때 흰색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과수원으로 왔다. 소녀는 사과 하나를 집어 베어 물었고, 잘 익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는 사과를 손에 들고 철학자가 앉은자리까지 걸어와 그를 바라보았다. 철학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소녀는 사과 한 입을 베어 물고 우적우적 씹어 꿀꺽 삼켰다. 철학자는 오류 하나를 찾아 여백에 적어 넣었다. 소녀는 사과를 던져버렸다.

     

    "저닝햄 씨, 많이 바쁘신가요?" 소녀가 말했다.

    철학자는 연필을 손에 든 채 고개를 들었다.

    "아니에요, 메이 양. 괜찮아요." 그가 말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잠시만요." 철학자는 사과하듯 말했다.

     

    그는 여백 페이지로 돌아가 방금 발견한 오류를 더 확실하고 견고하게 반박했다. 소녀는 처음에는 흥미로운 조바심으로, 그러다가 초조한 근심으로, 마침내는 회한이 어린 한탄의 표정으로 그런 그를 지켜보았다. 나이에 비해 훨씬 성숙해, 소녀는 생각했다. 철학자는 아직 삼십 대 초반이었다. 머리숱이 짙고 구불구불했으며, 눈빛은 밝고 맑았고, 얼굴에는 아직 젊음의 기운이 남아있었다.

     

    "자, 메이 양, 이제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철학자는 방금 자신이 적은 첨언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그는 책을 덮었지만 무릎에 올려두었다.

    소녀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 대해 여쭤보려고 해요." 소녀는 풀떼기를 잡아 뜯으며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이건 매우… 어려운 문제고, 제가 물어봤다는 걸 아무에게도 말씀하시면 안 돼요. 부탁이에요, 그래 주시길 바라요."

    "말하지 않을게요. 솔직히 말해서, 기억하지도 못할 거예요." 철학자가 말했다.

    "그리고 제가 물어보는 동안, 저를 너무 빤히 쳐다보지 말아주세요."

    "빤하게 보고 있는지 몰랐는데, 그랬다면 미안합니다." 철학자는 사과했다.

    소녀는 땅에서 풀떼기를 뽑아 있는 힘껏 던져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만약 어떤 남자가… 아니, 이렇게 시작하면 안 돼."

    "어떤 가정으로 시작해도 돼요. 하지만 가정 후에는 당연히 증명이 뒤따라야겠죠." 철학자는 평했다.

    "오 제가 말을 끝까지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저닝햄 씨, 만약 어떤 여자가… 그렇게 끄덕이지 않으시면 안 될까요."

    "이해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려고 했을 뿐이에요."

    "오 당연히 '이해'하시겠죠. 만약 어떤 여자가 동시에 두 명의 애인이 있었다면… 또 고개 끄덕이시네요. 아니, 그러니까, 만약 두 명의 남자가 한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치면요."

    철학자는 물었다.

    "두 명뿐인가요?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남자의 수는 어떠한 수라도 가능하죠…"

    "아, 나머지는 빼놓고 생각하죠.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메이 양은 보조개를 드러내며 말했다.

    "좋아요. 관련 없는 이들이라면 빼놓고 생각해도 되죠." 철학자가 말했다.

    "그래서, 만약에, 이 중 한 명의 남자가, 음 그러니까, 여자와 굉장히 깊이 사랑에 빠져서… 프러포즈를 한 거예요…"

    "잠시만요!" 철학자가 공책을 꺼내며 말했다.

    "프러포절 내용을 적어야겠어요. 내용이 어떻게 되나요?"

    "아니, 프러포즈는… 그와 결혼하자는 거였죠." 소녀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아 세상에! 참 멍청한 질문이었군요! 그 단어의 특정 의미를 잠시 잊었네요. 그래서?"

    "여자도 그를 꽤 좋아하고, 그 주변인들도 그에 대해 좋게 평가하고 있어요."

    "그러면 문제가 쉬워지는군요." 철학자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여자는 그를… 그를 사랑하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아요. 이해하시겠어요?"

    "완벽하게 이해합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죠."

    "그래요 그러면, 만약에 다른 남자가 있어서… 뭘 적으시는 거죠?"

    "그냥 (B)라고 적었어요. 이렇게요." 철학자가 순순히 공책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소녀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 너머에 언뜻 미소가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아, 저닝햄 씨는 정말이지… 어쨌든 계속할게요. 다른 남자는 여자의 친구이기도 해요. 그리고 굉장히 똑똑해요. 정말, 심하게 똑똑하죠. 그리고 꽤 잘생겼어요. 그건 적지 않아도 돼요."

    "네 별로 주요한 내용은 아니네요." 철학자는 인정하더니, 잘생겼다’는 지우고 똑똑하다’는 남겨두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엄청나게… 그를 굉장히 존경해요.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하죠. 그리고… 그리고…"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네 듣고 있어요." 철학자가 준비된 자세로 연필을 쥐고 말했다.

    "세상 무엇보다도 그에게… 그에게 무언가 의미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의 부인이 되고 싶다는 말이에요?"

    "네, 그러고 싶어요… 그러니까, 그런 것 같다는 말이에요."

    "굉장히 애매하게 이야기하시네요"

    여자아이는 철학자를 흘끗 쳐다보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부인이 되고 싶어 한다는 뜻이에요."

    "네. 그래서?"

    "하지만." 소녀는 다른 풀떼기를 잡아 뜯기 시작하며 말을 이었다.

    "남자는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어요. 그도 여자를 좋아해요.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해요…"

    "음, 싫어하지는 않는다는 거죠? 그를 무관심하다고 칭해도 될까요?" 철학자가 제안했다.

    "잘 모르겠어요. 네, 무관심한 편이죠. 그런 문제에 대해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여자는… 여자는 예뻐요. 그건 적지 않아도 돼요."

    "적을 생각 없었어요." 철학자가 말했다.

    "여자는 그와 함께하는 삶은 천국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리고 그를 굉장히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여자는… 그가 정말 자랑스럽거든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알겠어요. 그래서요?"

    "그리고…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여자는 남자가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다면 자신을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는 따로 마음에 둔 사람이 없고, 여자는 예쁘고…"

    "예쁘다는 건 아까도 이야기했어요."

    "세상에, 네, 그랬죠. 대부분의 남자들은 누군가를 마음에 두지 않나요? 좋아하는 상대를 말이에요."

    "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죠." 철학자가 인정했다.

    "그러면, 여자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건 실제로 있는 일은 아니에요, 저닝햄 씨. 이건… 이건 제가 읽던 소설에서 나온 이야기예요." 소녀는 빠르게 덧붙이며 얼굴을 붉혔다.

    "세상에! 상당히 흥미로운 케이스네요! 그래요, 알겠어요. 문제는, 여자가 현명하게 자신을 굉장히 사랑해주지만 약간의 호감만을 가지고 있는 남자의 청혼을 받을 것인가…"

    "네, 약간의 호감이요. 그 남자는 그냥 친구예요."

    "바로 그거예요. 아니면 자신이 굉장히 사랑하는 이와 결혼할 것인가…"

    "그게 아니에요. 여자가 어떻게 그와 결혼할 수 있겠어요? 남자는… 남자는 청혼한 적이 없거든요."

    "맞는 말이에요. 잠시 잊었어요. 그래도 잠시, 그가 물어봤다고 가정합시다. 그렇다면 여자는 둘 중 어느 결혼이 최대의 이득이 있을 것인가를 계산해서…"

    "아, 하지만 그런 건 고려하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그게 가장 논리적인 방법인걸요. 그다음에 우리는 불확실의 요소를 계산할 허용 오차 범위를 넣어서…"

    "오 아니에요. 그런 걸 물은 게 아니에요. 저는 그가… 그러니까 그 다른 남자가… 여자에게 묻기만 한다면 여자가 어떻게 할지 잘 알고 있어요."

    "메이 양,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죠…?"

    "제가 어떻게 '확신’하는지는 상관 말아요. 그냥 제가 얘기한 대로 생각하세요."

    "좋아요. A는 물었고, B는 묻지 않았어요."

    "맞아요."

    "그러면, B가 만약 존재하지 않았다면, A도 만족스러운… 음… 후보라고 생각해도 되나요?"

    "네에…… 그런 것 같아요."

    "그러니까 A와 결혼해도 어느 정도의 행복을 누릴 것이라는 것은 확실한 거죠?"

    "네에…… 완벽하지는 않겠지만요. B 때문에요."

    "그렇겠지요,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행복은 보장되죠. 안 그래요?"

    "잘 모르게… 네, 그런 것 같아요."

    "반면에, 만약 B가 청혼한다면 우리는 여자에게 더 큰 행복이 있을 거라고 가정할 수 있는 거죠?"

    "네, 저닝햄 씨. 훨씬 큰 행복이요."

    "둘 다에게?"

    "여자에게요. 남자는 모르겠어요."

    "좋아요. 그럼 문제가 간단해지네요. 하지만 그가 청혼한 것은 가정에 불과하죠?"

    "네, 그래요."

    철학자는 손을 쭉 뻗었다.

    "애정 하는 메이 양, 이제 정도의 문제가 되네요. 그 확률이 얼마나 높거나 낮을까요?" 그가 말했다.

    "모르겠어요. 별로 높지 않은 것 같아요… 만약…"

    "네?"

    "만약 남자가 눈치챈다면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요."

    "아, 그렇죠. 만약에, 남자가 한 번쯤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원하는 행동을 할 수도 있겠죠. 아니면 적어도 그런 방향으로 유도하거나. 여자가… 음… 호감을 표시할 수는 없을까요?"

    "시도해볼 수는 있겠지만… 아니에요, 그렇게까지 못할 거예요. 그게, 남자는… 남자는 그런 부분에 대해 평소에 전혀 생각하지 않거든요."

    "완벽하게 이해했어요. 제가 보기에는, 메이 양, 그 사실에서 우리의 답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런가요?" 소녀가 물었다.

    "그런 것 같아요. 그가 여자에게 자연스럽게 끌리는 감정이 없다는 건 명백하고, 결혼에 대해서도 그런 것 같네요. 감정이 생긴다고 해도 무척 피상적일테고, 어느 정도는 인위적이고 아마도 매우 일시적이겠지요. 게다가, 여자가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행동을 한다면 다음 중 하나의 결과가 발생할 거예요. 제 얘기 잘 따라오고 있나요?"

    "네, 저닝햄 씨."

    "그가 여자의 제안에 불쾌함을 느끼거나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인정해야 해요. 그러면 여자는 굉장히 불편하고, 심지어 모욕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겠죠.) 아니면 다른 가능성은, 그가 잘못된 기사도 정신을 가지고…"

    "무엇을 가지고요?"

    "그러니까 예의에 대한 잘못된 인식, 혹은 친절함에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 진심 없는 관계를 맺게 되겠지요. 이 중 한쪽이나 다른 쪽으로 가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에 동의하세요?"

    "네, 그렇겠네요. 그가 여자에게 감정이 생기지 않는 한에서요."

    "아, 그 가설로 돌아왔군요. 제가 보기에는 굉장히 비현실적인 가설이에요. 아니에요, 여자는 A와 결혼할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B는 내버려두는 게 맞아요."

     

    철학자는 책을 덮고 안경을 벗어 닦고 다시 쓰고는, 사과나무에 기대앉았다. 소녀는 민들레의 꽃잎을 하나하나 뜯어내고 있었다. 오랜 침묵 후에 물었다.

    "B의 마음이 바뀔 가능성은 전혀… 전혀 없다고 생각하세요?"

    "그가 어떤 남자냐에 따라 다르겠지요. 하지만 그가 능력 있고, 열중하는 지적 분야가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인생의 길을 정한 사람, 그러니까 여성과의 교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이 맞아요." 여자가 데이지의 꽃 부분을 물어뜯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의 마음이 바뀔 가능성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가 없군요." 철학자가 말했다.

    "그러면 다른 남자, A와 결혼하라고 조언하시겠어요?"

    "음, 전체를 봐서는 그게 맞겠죠. A는 좋은 사람이고 (우리가 A를 좋은 사람으로 가정했다는 것이 맞다면) 적당한 결혼 상대이며 여자에 대한 사랑이 진실되다면…"

    "그 마음은 진짜예요!"

    "네… 그리고… 음… 확실하네요. 여자도 그를 좋아하고요. 여자가 가진 호감이 점점 깊고 안정적인 마음으로 커질 가능성에 대한 근거도 충분하고요. 여자는 B에 대한 헛된 마음을 접고, A에게 좋은 부인이 될 거예요. 네, 메이 양, 제가 그 소설의 작가라면 저는 여자가 A와 결혼하도록 하고, 그걸 해피 엔딩이라고 부르겠어요."

     

    침묵이 뒤따랐다. 철학자가 침묵을 깼다.

    "제게 물어볼 것은 그게 다인가요, 메이 양?" 그가 존재론에 대한 논문의 페이지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네, 그런 것 같아요. 지루하게 한 건 아니죠?"

    "굉장히 즐거운 이야기였어요. 저는 소설에서 이렇게 흥미로운 심리적 문제를 다루는지 몰랐어요. 시간을 내서 소설도 읽어보아야겠네요."

     

    소녀는 자세를 바꾸어 철학자에게 옆얼굴이 보일 때까지 돌아 앉았다. 그렇게 과수원 가장자리에 햇살을 받으며 아름답게 빛나는 방목지를 바라보며, 무릎 위에 올린 손을 베베 꼬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B가 나중에 (그러니까 여자가 A와 결혼한 후에) 여자가 그를 굉장히 좋아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슬퍼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신사라면 굉장히 유감스러워하겠죠."

    "제 말은… 그게 개인적인 감정이냐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다 놓쳤다는 생각에 말이에요."

    철학자는 사색에 잠긴 듯했다.

    "제 생각에는, 꽤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군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가 결론을 내렸다.

    "그는 자신을 그렇게 사랑해주는 사람을 다시는 못 만날지도 몰라요." 소녀는 빛나는 방목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 그렇겠죠." 철학자가 동의했다.

    "그리고…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나요?"

    "인류의 사랑에 대한 욕망은 거의 모두가 가진 본능에 가까워요, 메이 양."

    "네, 거의 모두가 그렇죠. 그는 늙어서 아무도… 아무도 돌봐줄 사람이 없을 거예요." 소녀는 쓸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가정도 없을 거고요."

    철학자는 웃으며 말을 바꿨다.

    "네, 없겠네요. 지금 저를 굉장히 겁주고 있군요. 알다시피 저도 미혼이라고요, 메이 양."

    "네." 소녀는 겨우 들릴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메이 양이 말한 걱정은 다 제가 겪어야 할 것들이죠."

    "글쎄요, 만약…"

    "오, '만약'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 없어요. 거기에 '만약'은 없어요, 메이 양." 철학자가 쾌활하게 웃었다.

     

    소녀는 벌떡 일어나 철학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혀 끝에 머문 말을 생각하니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철학자는 이에 무감한 듯 소녀 너머를 보았고, 방목지의 빛나는 경치에 평온한 명상에 잠겼다.

    "햇살은 정말이지, 아름다운 것이네요." 그가 말했다.

    붉었던 소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소녀는 입술을 다물었다. 결국 말을 꺼내지 못한 채, 뒤를 돌아 고개를 떨구고 천천히 멀어졌다. 철학자는 과수원의 긴 풀에 쓸리는 치맛자락 소리를 들었다. 그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아름답고 우아한 생물체야."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연필을 쥐고 책을 펼쳐 여백 페이지에 검지를 조심스럽게 껴 넣었다.

     

    그가 책을 다 끝내기도 전에 해는 이미 정오를 넘어 서쪽으로 지기 시작했다. 그는 몸을 쭉 뻗고 시계를 보았다.

    "세상에, 두 시잖아! 점심시간에 늦겠어!" 하고 외치고는 급히 일어났다.

    그는 점심에 많이 늦고 말았다.

     

    "다 식어버렸어요. 대체 어디 있었어요, 저닝햄 씨?" 숙소 주인이 한탄했다.

    "과수원에 있었어요. 책을 읽고 있었거든요."

    "메이도 놓쳤잖아요!"

    "메이 양을 놓치다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는 아침에 긴 대화를 나누었어요. 정말 흥미로운 대화였어요."

    "하지만 작별인사를 할 때 없었잖아요. 메이가 두 시 기차를 타고 떠나기로 했던 걸 잊어버린 건 아니죠? 정말 너무하네요!"

    "세상에! 그걸 잊어버리다니!" 철학자가 자책감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에게 작별인사를 대신 전해달라고 했어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럽네요."

    주인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고, 미소를 짓더니, 다시 한숨을 쉬었다.

    "더 필요한 거 없죠?" 주인이 물었다.

    "네 없어요, 고마워요." 그는 테이블 위 놓인 치즈의 반대편에 앉아 책을 치즈에 기대 세웠다. (그는 마지막 챕터만 다시 훑어볼 생각이었다.)

    "세상에서 제가 필요한 것은 다 여기 있네요, 고마워요."

     

    주인은 그에게 소녀가 사과 과수원에서 돌아와,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고 빠르게 계단을 올라가 숨었던 것을 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철학자는 그가 결혼에 대한 제안을 받았고 그것을 거절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는 오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않았는데, 단 한 번 책을 읽다 멈추고 이렇게 소리쳤을 뿐이다.

    "메이 양을 놓친 건 정말 유감스럽네요. 그때 얘기한 문제는 정말 흥미로웠어요. 하지만 난 맞는 답을 주었어요. 여자는 A와 결혼하는 게 맞아요."

     

    그리고 여자는 그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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