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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플로리다 프로젝트> 행복한 슬픔에서, 슬픈 행복으로
    적은 글/보고 적은 글 2020. 11. 15. 01:19

    무니와 젠시가 디즈니월드의 성 앞으로 달리다가 군중 속으로 모습을 감춘 순간,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엔딩은 영화 내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던 양가적 감정을 담은 채 툭, 끝나버렸다. 영화의 주요 배경인 ‘매직 캐슬’은 ‘매직 킹덤’에 속하지 못한, “여기는 디즈니월드도 아니잖아!”라던 브라질 관광객의 말로 대략 설명되는 곳이다. 디즈니월드에 속하지 못한 싸구려 모텔, 매직 캐슬에 찾아온 신혼부부의 장면은 영화의 많은 부분을 담고 있다. 타지인이 보기에는 ‘뭔가 잘못된’ 모텔촌, 그러한 모텔촌에서 생활터를 일군 사과 없는 사람들, 다른 데는 방이 없다는 말이 넌지시 암시하는 탈출구 없는 상황, 이 모든 것을 창 밖에서 바라보는 아이들. 아이들은 상황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동떨어져 있지도 않다. 창밖에서 상황을 바라보던 무니는 말한다. “어른들이 울려고 하면 난 바로 알아.”

     

    카메라는 이 광경을 안팎에서 응시한다. 벌어지는 어른들의 갈등과 바라보는 아이들의 대화를 보여주는데 영어와 포르투갈어가 뒤섞여서 매직캐슬의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까지 다 듣게 되는 관객의 마음은 복잡하다. 관광객은 매직 캐슬을 3류 모텔이라고 못 박고, 3류 모텔에 사는 아이들은 그를 불쌍해한다. 이들 사이의 간극은 둘이 쓰는 언어만큼이나 커 보였다.

    영화는 매직캐슬에 사는 인물들을 평행하게 따라가며 모텔촌의 이모저모를 소개한다. 바비를 따라가는 카메라는 구호 단체의 밴을 치우고 밝은 페인트로 덮어 치장한 매직 캐슬의 맨얼굴을 보여주고, 핼리를 통해 살림살이로 채워 ‘주거지’로 탈바꿈한 모텔 방 안의 모습을 엿본다. 모험을 찾아 종횡무진 달리는 아이들은 매직캐슬 바깥의 거대한 가게들, 방치된 콘도 단지와 습지를 보여준다. 밝은 원색을 빼면 멀리서 바라본 광경은 그리 특별하지 않다. 미국의 소도시에서 흔히 접하는 사람을 조그맣게 만들어버리는 건물들이다. 하지만 올랜도를 특이하게 만드는 것은 이 곳에 머무는 사람들과 그들이 바꿔놓은 풍경이다.

    “월 1000달러 내는데 이 따위로 할 거야!” 아이들의 장난으로 전기가 잠시 나가자 분노한 주민의 외침이었다. 월세 1000달러가 적은 돈인가? 아니다. 그 돈이라면 다른 곳에 살 수 있다. 금액만으로 보면 말이다. 그러나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이라면, 일수로 방값을 계산하는 모텔에서 단기 거주를 장기화하는 방법밖에 없다. 밝은 색상으로 위장한 매직 캐슬을 채운 것은 그다지 밝지 않은 생활들이다. 하지만 영화는 부정적인 현실에 집중하는 대신 아이들을 따라가며 그들의 즐거운 놀이 뒤로 어른들의 삶을 감춘다.

     

    아이들이 수백 년도 더 된 집들이라고 부수고 들어가는 것은 2008년 리먼 사태 이후 경기 침체로 유령촌이 된 콘도 단지고, 공짜로 받는 아이스크림은 거짓말을 통한 구걸이다. 화면의 뮤직비디오를 따라 춤을 추는 무니 뒤에서는 핼리가 방세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고, 무니는 그저 흥분한 핼리를 따라 소리 지른다. 그리고 무니가 목욕 중인 욕실 바깥에서는 성매매가 이루어진다. 카메라가 비극을 비추는 시선을 하고 있었다면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마음에 이렇게 오래 남지는 않았을 것 같다. 카메라가 담는 것은 아이들 뒤의 현실이 아닌 그 안에서도 지속되는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이고, 상황을 맞는 아이들의 얼굴이다. 영화는 콘도에 불이 번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풀이 죽어 돌아온 스쿠티와 애슐리의 대화를 보여주지 않고, 아동국에 연락하는 애슐리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불구경을 보고 신난 사람들 사이 어쩔 줄 몰라하는 무니의 표정을 보여주고, 스쿠티가 빠져 둘이 된 무니와 젠시가 이어나가는 모험을 보여주고, 아동국의 등장에 “엄마 왜 화났어요?”하고 묻는 무니를 보여준다. 천진한 아이들이 주는 아이러니에 슬픈데 행복하고, 행복한데 슬프다. 복잡한 마음은 직선적 감정보다 오래 남는다.

    아이들을 따라가지 않을 때 카메라는 영화의 다른 두 주인공 바비와 핼리를 담는다. 바비는 일반적인 모텔 매니저의 역할 이상으로 사람들의 삶에 개입하며, 다양한 사연으로 아버지 (혹은 어머니, 혹은 둘 다) 없이 자라는 아이들에게 유사-아버지의 역할까지 해낸다. 그는 비현실적으로 선량하고 얼핏 전능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짐을 나르는 일을 도와주던 청년이 그의 아들인 것이 밝혀지면서 바비 또한 자신의 아들에게는 실패한 아버지일 뿐임을 알게 된다. 집에서 부재한 아버지가 모텔에 거주하며 이 곳의 ‘아버지’로 사는 모순에, 언급되지 않았던 부재한 아버지들의 존재에 대해 처음으로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전까지 관찰자의 자리에 있던 바비는 여기서 매직캐슬의 일원이 된다. 관객이 쉽게 이입할 수 있는 자리에서 바비가 벗어남으로써 영화는 매직 캐슬의 사람들을 손쉬운 측은지심의 자세로 대하는 과오를 피했다. 바비가 핼리의 삶에 간섭하고 아이들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는 것은 바비가 우월한 위치에 있어서가 아니라, 바비도 그들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매직 캐슬을 함부로 ‘불쌍한’ 자리에 넣지 않는다. 그저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응시한다.

     

    바비가 이입하기 쉬운 자리에서 시작해 그 자리를 벗어나며 감정적 거리가 멀어진 캐릭터라면 핼리는 이입하기 가장 어려운 자리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그 반대다. 아이들을 방치한 무책임한 보호자.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하고 끝없이 마리화나를 피고, 입에서 나오는 것은 욕과 분노 표출뿐인 그녀에게 다가가기는 쉽지 않았다. 언뜻 비치는 고독에서도 뒷모습만 보일 뿐이다. 그런데 아동국의 등장 후 무니를 데려간 옆 호텔의 조식 뷔페에서 카메라가 갑자기 그녀에게 이입한다. 행복하게 배를 채우는 무니를 핼리의 시점으로 아주 길게 보여준다. 심도가 아주 얕은 렌즈로 잡은 무니의 얼굴은 뚜렷하지만 움직임에 따라 자주 포커스가 나가고 주변이 흐릿해서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사람의 시선 같다. 핼리는 어쩌면, 비로소 고통을 감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바로 본 무니는 유난히 더 사랑스럽다.

     

    한걸음 들어가 개개인의 감정에 이입하기보다는 한 발짝 물러나며 여운을 남기는 방식으로 관객을 이끌어나가던 카메라가 갑자기 응시를 멈추고 인물 속으로 들어갔다. 왜 영화는 여기서 갑자기 과감하게 이들의 편에 선 걸까? 이제 관찰할 만큼 관찰했으면 이들의 고통도 함께 느껴보라는 일종의 초대일까? 보이는 것의 이면에 집중하던 영화가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이번에는 핼리의 이면(속내)을 보여준 것인지도. 어쨌든 이 장면 이후로 무니의 짐을 싸는 핼리를 무덤덤하게 바라보기는 어려워졌다.

    친절하고 매뉴얼을 정확히 따르는 아동국은 감정에 솔직하고 주장이 강한 무니를 붙잡아두기에 역부족이다. 이야기 속 괴물과 같이 보이지 않는 존재였을 아동국의 등장이 뭘 의미하는지 무니는 정확히 알고 있다. 무니와 젠시는 그들 이야기 속 주인공답게 스스로 도망치기를 택한다. 영화 내내 화면을 횡으로 가로지르며 달리던 아이들은 마지막에 이르러 처음으로 목적성을 가지고 뛰어나간다. 앞으로 달려 나가는 무니와 젠시의 뒷모습은 매직 캐슬 위로 떠올랐던 무지개 끝의 황금, 그 황금을 지키는 난쟁이 요정을 때려눕히러 가자고 당차게 소리를 지르고 달려 나가던 둘의 뒷모습과 겹쳐 보인다.

    다시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왔다. 이야기가 현실에 머무른다면 무니에게 줄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아동국을 피했다 한들 핼리와 남아 매직 캐슬의 생활을 이어갈 뿐이다. 매직 캐슬의 낡은 불행을 덮은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은 여름날의 아이스크림처럼 지금 먹지 않으면 녹아내릴, 한시적인 달콤함이다. 핼리의 말투와 걸음걸이까지 따라 하는 무니의 미래도 핼리의 현재와 많이 다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감독은 무니와 젠시를 영화 속 현실에서 벗어나 환상의 세계로 보내주기로 한 듯하다. 아이들을 열심히 쫓아 달리던 카메라가 디즈니 성 앞에서 멈춰 선 것은 그러한 결심의 결과로 보였다. 더 이상 붙잡지 않을 테니 환상의 세상으로 날아가라는.

    영화 내내 나를 흔들었던 행복한 슬픔은, 마지막에 슬픈 행복이 되어 끝났다. 아이들이 행복하게 만들어준 슬픈 현실의 어른들은, 결국 아이들의 행복을 현실에서 찾아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아이스크림이 녹기 전에 어서 벗어나라고, 영화에서만 가능한 엔딩을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아이들에게, 그리고 관객들에게 선물했다. 그래서 나는 이 장면이 그토록 오래 남았나 보다. “당신네 말본새를 보니 이렇게 살만하네요.”라는 생각을 함부로 하지 않겠다는 현실의 다짐 정도를 남기며, 나도 이제 이 영화를 서랍에 담고 놓아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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