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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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탄>, 짧은 감상적은 글/보고 적은 글 2021. 12. 15. 17:26
*최대한 스포일러를 빼고 씁니다 몇 개월 전에 한 번 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꽤나 위험한(?) 일이지만, 에 대해서는 짧게라도 기록하고 싶었다. 훌륭한 영화에 종류를 나눈다면, 이 영화는 “말하고 싶게 만드는” 류다. 나는 영화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1회 차 상영으로 보았다. (자극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영화에 번뜩 잠이 깨기 좋은 시간이다) 영화는 물론 아주 이른 아침부터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더욱 재미있던 것은 영화가 끝난 뒤 한바탕 대화의 장이 열린 영화관이었다. 영화제에서 영화가 끝나고 그렇게 활발한 대화가 오가는 광경을 본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게 만들 정도였다. 확실히 아침 9시에 상영한 은 나 말고도 많은 관객들에게 깊은 충격과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이 아침 일찍 상영했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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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국제를 가는 마음적은 글 2021. 10. 6. 16:42
영화를 좋아하는 일은, 실은 그리 쉽지 않다. (다른 류의 공연, 혹은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듣는다면 비웃겠지만 말이다) 두 시간 남짓 하나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은 꽤 많은 에너지를 요한다. (스트리밍 시대, 숏폼 콘텐츠가 유행하는 시대에 영화는 왜 점점 더 길어지는지) 예능, 유튜브, 드라마는 밥을 먹거나 소일거리를 하며 느슨하게 대할 수 있지만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밥을 먹으면서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가벼운 코미디, 킬링 타임용 액션 영화라면 팝콘이나 감자칩 정도는 허용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 같은, 적막해서 더더욱 사운드가 중요한 영화를 보며 스스로가 과자를 씹는 소리를 듣는 것은 끔찍하다. 같이 한 순간의 미장센도 놓칠 수 없는데 자막이 없이는 스토리를 따라가기도 어려운 영화에서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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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타 거윅 <레이디 버드> <작은 아씨들> 우리를 만들어낸 시간들적은 글/보고 적은 글 2021. 7. 8. 18:16
개인적인 트리비아를 먼저 얘기하며 시작해보자면, 나는 개봉 당시 중국에서 영화를 관람했다. 새로 오픈한 영화관의 거대하고 푹신한 소파와 무릎 담요를 놓아주는 세심함, 관람객들 사이의 편안한 거리와 반짝이는 인테리어에 감탄하며 들어가서 “부적절한” 장면을 뭉텅뭉텅 잘라버린 영화를 보고 혼란스러워하며 나왔다. 후에 친구에게 영화는 전반적으로 좋았지만 중간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고 (예를 들자면, 크리스틴의 첫 남자 친구 대니가 다른 남자와 화장실 부스에서 키스를 하는 장면이 잘려있었고 나는 남자 화장실로 뛰어들어가는 크리스틴과 줄리의 모습 직후에 차에서 울음을 터뜨린 둘을 보았다) 그제야 영화의 공식 러닝타임에서 시간이 부족한 것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유튜브 클립으로 잘려나간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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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즈&이어즈> 숨가쁘게 변화하는 세상, 그리고 트랜스 휴먼적은 글/보고 적은 글 2021. 4. 8. 17:51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잦은 야근과 스트레스로 뒷목은 뻣뻣해지고 팔다리는 천근만근인 날들이 지속되면, 확실히 몸뚱이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 아니 그뿐인가. 가시지 않는 편두통으로 도저히 집중하기 어려울 때, 암만 진통제를 들이부어도 생리통이 사라질 줄 모를 때, 내일이 없다는 듯 마신 대가로 숙취에 시달리며 물 한 모금 넘기기도 괴로울 때… 계속해서 나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 몸이 아쉽고, 통제되지 않는 생리현상이 불편했던 적도 많다. 먹고 마시고 배출하고. 먹어서 찌우고 움직여서 다시 빼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꾸만 고장 나고 삐그덕 대는 부분을 관리하고 고치고. 육체라는 것은 정말 많은 노력과 수고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영원히 고장 나지 않는 몸을 바라는 것이 20세기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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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유형, 필립 K. 딕, Second Variety, Philip K. Dick, 1953옮긴 글/두 번째 유형, 필립 K. 딕 2021. 3. 30. 12:19
*원문 링크: www.gutenberg.org/files/32032/32032-h/32032-h.htm 집게란 존재들은 태초부터 유해했다.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작고 고약한 살인 로봇. 하지만 그들이 창조자를 흉내내기 시작한 순간, 인류는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찾아야 할 때가 왔다.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러시아 병사는 언제든 발사할 준비가 된 총을 들고 황폐한 언덕을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그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굳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끔씩 목에 흐른 땀을 닦고 코트의 깃을 내리기 위해 장갑 낀 손을 올렸다. 에릭은 리온 하사에게 말했다. "직접 하실래요? 아니면 제가 할까요?" 그는 모니터를 조정해 러시아인의 얼굴이 화면을 채우도록 만들었다. 화면 위의 선이 그의 날카롭고 침울한 이목구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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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네> 사랑이 운명이 되려면적은 글/보고 적은 글 2021. 1. 2. 15:25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요즘 사랑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사랑의 개념이나 의미 같은 것이 아니라, 위대한 사랑의 힘이나 박애주의적 사랑 같은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다시 그 사랑에서 빠져나오는 것에 대해서. 사랑이 진행 중인 기간에만 유효한 무한함에 대해 생각한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 사이의 약속들, 영원함에 대한 속삭임의 부질없음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그 부질없음을 겪고 또 겪으면서도 또 별 수 없이 사랑에 빠지고 마는 마음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는 바로 이러한 "운명적 사랑", 혹은 "사랑이 정의한 운명"에 관한 영화다. 평범한 여자의 특별한 사랑 영화의 첫 장면에서 주인공 운디네는 이별을 통보받고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아마도 방금 전 헤어지자고 이야기한 (엑스) 연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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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미 감독이 학교와 아웃사이더를 그려내는 법: <비밀은 없다> <미쓰홍당무>적은 글/보고 적은 글 2020. 12. 31. 21:06
보이지 않았던 세계 에는 세 겹의 세계가 있다. 가장 겉면에 위치하여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바로 종찬으로 대표되는 경상도 정치인들의 세계다. 뉴스와 각종 작품에서 자주 만났던 이 세계는 가장 현실적으로 그려지며 뒤에 나올 두 세계와 대조되는 ‘리얼리티의 세계’다. 민진이 실종되면서 이 세계에 포함되어 있던 연홍의 세계가 갈라져 나온다. 잘 나가는 아나운서이자 신예 정치인의 살뜰하고 야무진 부인으로 잘 섞여 들어 보이던 허상이 벗겨지고 고립된 이방인으로서의 연홍이 정체성이 드러나면서 그만의 ‘혼돈의 세계’를 구축한다. 혼돈의 세계는 연홍의 혼란스러운 상태를 일컫는 동시에 그 세계의 불완전함을 뜻한다. 혼돈의 세계는 콘트라스트를 높여 보이지 않던 흠과 굴곡까지 모두 드러난 이미지와 같이 보인다. 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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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 프로젝트> 행복한 슬픔에서, 슬픈 행복으로적은 글/보고 적은 글 2020. 11. 15. 01:19
무니와 젠시가 디즈니월드의 성 앞으로 달리다가 군중 속으로 모습을 감춘 순간, 의 엔딩은 영화 내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던 양가적 감정을 담은 채 툭, 끝나버렸다. 영화의 주요 배경인 ‘매직 캐슬’은 ‘매직 킹덤’에 속하지 못한, “여기는 디즈니월드도 아니잖아!”라던 브라질 관광객의 말로 대략 설명되는 곳이다. 디즈니월드에 속하지 못한 싸구려 모텔, 매직 캐슬에 찾아온 신혼부부의 장면은 영화의 많은 부분을 담고 있다. 타지인이 보기에는 ‘뭔가 잘못된’ 모텔촌, 그러한 모텔촌에서 생활터를 일군 사과 없는 사람들, 다른 데는 방이 없다는 말이 넌지시 암시하는 탈출구 없는 상황, 이 모든 것을 창 밖에서 바라보는 아이들. 아이들은 상황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동떨어져 있지도 않다. 창밖에서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