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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꽃무늬와 함께적은 글 2020. 6. 28. 20:35
숙소에 대충 짐을 풀고 길을 나섰다. 리스본은 포르투보다 약간 더 더웠다. 오십 걸음도 가지 않아 문을 활짝 열어젖힌 한 가게 앞 걸려있는 화려한 무늬의 셔츠들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갔다. 서퍼들을 위한 각종 도구, 굿즈, 의류를 파는 편집숍이자 포케를 서빙하는 카페였다. 어둑한 조명 아래 알록달록한 원색의 소품과 옷이 진열되어 있었다. 여자 친구인지 부인인지 딸인지 모르겠는 누군가의 선물을 고르느라 애를 쓰는 한 중년의 남자 뒤로 걸려있는 옷이 눈에 들어왔다.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검은색이 섞인 꽃무늬가 지나치게 화려하고 어깨 라인과 조그마한 단추의 모양이 복고풍인 셔츠였다. TPO에 따라 굉장히 달라질 옷이다. 해변에서 입으면 원색의 서퍼가, 을지로에서 입으면 촌스러움을 아이러니하게 소화하는 힙스터가, 시장에 있으면 할머니 옷을 빌려 입은 손녀가 될 것이다.
나는 흥분한 목소리로 친구를 불렀다. 이거 봐! 너무너무 촌스러워! 너무너무 맘에 들어! 나는 평소에는 무채색의 깔끔한 옷을 주로 입지만 여름만 되면 옷이 난데없이 화려해지고는 했다. 평소에는 입지 못할, 여행지에서만 과감하게 꺼내볼 수 있는 스타일의 옷에 자꾸만 손이 가서 옷장에는 휴가 때만 꺼내볼 수 있는 옷이 수두룩했다. 화려한 무늬의 얇고 꺼슬꺼슬한 소재를 매만지면 바다의 짠내가 느껴지는 것만 같은 옷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촌스럽지? 아쉬운 마음으로 옷을 내려놓고 가게를 나섰다. 친구도 매만지던 (조금 더 고급스럽고 무난하게 예쁜) 셔츠를 내려놓았다. 가게를 나서고 열 걸음 정도 갔을까,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거리의 파스텔 빛 건물을 비추는 햇살이 지나치게 눈부셨다. 나는 그 촌스러운 셔츠를 입고 쨍한 리스본의 거리를 걷는 상상을 했다. 친구와 눈빛을 교환하고 다시 가게로 향했다. 이거 주세요! 챙겨간 장바구니를 탁탁 펼쳐 셔츠를 담았다.
셔츠를 입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아니, 나긴 난데 서울의 내가 아닌 리스본의 나랄까? 어쩌면 그게 여행을 가는 목적인지도 몰랐다. 익숙하고 조금은 지긋지긋한 나에게서 벗어나 새로운 내가 되어보기 위해. 평소의 내가 ‘도’ 정도였다면 나는 ‘솔’까지 올라갔다. 어깨춤을 들썩들썩 추며 가벼운 옷자락이 날리는 느낌을 즐겼다. 길지 않은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고, 나는 마지막 날을 완연히 즐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날은 무엇 하나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원래 가려고 했던 유명한 수도원의 줄이 1km쯤 늘어서 있는 것을 보고 미련 없이 포기하고는 근처의 현대 미술관에서 한적함을 즐겼다. 미술관을 나와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찾아간 바닷가 식당에 자리가 없어 그 옆 가게에서 너무 맛있어서 울면서 먹었다. 리스본에 가면 꼭 타보라고 하던 28번 트램에 사람이 너무 많아 그냥 거리를 걸었고, 우연히 들어간 헌책방에서 보물을 발견했다. 저녁에 가려고 예약해 놓은 파두(Fadu) 공연을 하는 유명한 레스토랑의 평이 생각보다 좋지 않아 어쩐지 기분이 싸해져서 예약을 취소했다. 대신 허름한 바에 가서 동네 동호회 사람들이 모여 즐기는 것 같은 파두 공연을 보며 와인을 마셨다. 딱히 음식이 없어서 치즈 플래터를 시켰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었다. 어쩐지 나도 술집을 열어볼까 꿈을 꿔보게 하는 안락하고 친근한 공기가 감도는 곳이었다. 친구와 나는 늙어서 어떤 가게를 열지 궁리하며 취해갔다. 더할 나위 없는,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리고 나는 어딜 가나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었다.
돌아와서 시차 적응을 할 새도 없이 북경에서 알고 지낸 친구들이 서울에 놀러 왔다. 언제나 밥 먹고 술을 마시는 루틴이 뻔해서 제부도로 1박 2일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나는 끝나가는 여름을 붙잡는 마음으로 리스본에서 산 셔츠를 다시 한번 꺼냈다. 17시간 동안 캐리어에 담겨오느라 구겨져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먼지를 탕탕 털어냈다. 우리는 제부도의 바닷가 옆 작은 놀이공원에서 디스코팡팡을 탔다. 디스코팡팡은 진행자의 권한이 굉장히 큰 놀이기구였다. 진행자는 다양한 멘트로 사람들을 우롱하며 최대한 많이 괴롭히기에 도전하고 사람들은 돈을 내고 기꺼이 그에게 휘둘린다. 타기 전부터 예상했지만 나는 화려한 옷으로 인해 표적이 되었다. 거기 할머니 옷 입고 오신 분! 할머니 옷을 입고 오면 어떡해~ 할머니가 지금 옷 찾아요~ 진행자의 맹공격에 몸이 헝겊인형처럼 퉁퉁 튕겨 다녔고 쇠봉에 부딪힌 양 팔에는 옷만큼 울긋불긋한 피멍이 들었다. 신나게 논 다음 남은 몸의 흔적이 어쩐지 싫지 않았다.
우리는 1박 2일 동안 정말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자연스러운 사진도 찍고, 콘셉트 사진도 찍고, 웃긴 사진도 찍고, 셀카도 찍고, 서로를 찍어주기도 했다. 사진첩에는 서울 김경현이 아닌 여행자 김경현의 사진들이 가득 찼다. 사진첩으로만 보면 여행자 김경현이 주류였다. 별다른 이벤트 없이 그냥 찍는 사진들은 잘 없었다. 사진 속의 나는 대체로 ‘솔’의 상태로 활짝 웃거나 들떠 있었다. 알록달록한 사진첩이 마음에 들었다. 이튿날 친구들을 공항에 데려다주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왔다. 한껏 들뜬 채 보낸 늦여름의 기운이 빠져나가자 몸이 굉장히 나른하고 무거워졌다. 나는 포트투갈에서부터 밀려있던 세탁물을 모두 꺼내 두 번에 나눠 세탁기를 돌렸다. 씻겨 나오는 여행지의 때와 함께 어느새 2019년의 여름이 끝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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