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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도시에 (아보카도) 뿌리 내리기적은 글 2020. 5. 12. 09:04
혼자 있기를 즐기는 사람에게도 외로움은 찾아온다. 익숙한 공간에서도 그러한데, 낯선 타지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특히나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곳에 고립되어 있다면. 이십 대 후반의 나는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모험이 주는 두려움보다 반복되는 일상의 무료함을 더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삼 년이 조금 넘게 다니던 첫 직장을 그만두고 전혀 연고가 없는 베이징으로 떠나기로 한 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놀랍고 조금 이상하기도 한 일일지 모르나 내게는 꽤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서울을 떠나 새로운 지역에 (여행보다는 긴 호흡으로) 자리 잡고 살아볼 생각이었고 마침 기회가 베이징에서 날 불렀을 뿐이었다. 중국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 심지어는 중국에 짧은 여행조차 가보지 않았다는 점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낯선 곳에 가면 나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 늘어난다. 세상과 나, 단 둘만 남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5월에 도착한 베이징은 (당시에는 몰랐지만 국제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맑고 푸르렀다. 높이 솟은 오래된 가로수 아래를 걸으며 몇 번이나 감탄했다. 세월을 견딘 거대한 나무의 평온함과 그 아래 뒤엉킨 차와 사람들의 부산함이 이루는 대조가 살아 숨 쉬는 베이징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나는 도시의 첫인상을 나무로 결정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때 알았고, 녹색빛 베이징의 첫인상은 합격이었다. 숙소를 찾아가고, 직장까지 가는 법을 탐색하고, 각종 서류 문제를 해결하고, 첫 끼니를 먹을 장소를 찾는 일상적인 것들이 단 하나도 쉽게 되지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아 같은 걸음을 몇 번이고 반복하고, 어느 음식점에 가야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있을지 탐색하는 과정은 굼떴지만 짙은 녹음 속을 헤매며 나는 그 시간을 즐겼다. 그때까지 나는 여행자였으니까. 여행은 헤매는 것이 바로 즐거움이니까.
베이징은 기대보다 더 타인에게 친절한 도시였다. 오랜 역사를 지나오며 온갖 사람은 다 봐온 도시라 그런지, 관대하고 너른 아량으로 이방인을 받아주었다. 서투른 시간이 지나가고, 한 마디도 통하지 않던 ‘여행자’가 제법 말귀를 알아듣게 되면서 나는 조금씩 ‘현지인’이 되어갔다. 매일이, 모든 일과가 하나의 과제가 되는 시기가 지나고 조금씩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 갈수록 생활에 텅 빈 공백이 생겼다. 그리고 그 공백에 파고드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외로움. 외로움은 주로 퇴근 후 저녁을 먹고 이것저것 정리한 뒤 잠자리에 들기 전 그 뜨는 시간에 찾아왔다. 고요가 적막이 되고, 나를 둘러싼 이 익숙한 방을 나가면 혹시 세상은 멸망한 채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밀려오는 시간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친절한 사람들에게 각종 도움을 받았다. 일터에서, 중국어 학원에서, 자주 마주치고 인사하는 친근한 얼굴들도 생겼다. 그들 중 누군가가 곁에 진정한 친구로 남기 위해서는 보다 긴 시간이 필요할 테다. 시끄럽게 북적이는 각종 가게들에서 떠도는 자유로운 영혼들, 나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도시를 헤매는 타지인들과의 즐거운 만남들도 많았다. 서로를 모르기 때문에 나눌 수 있는 솔직한 대화와 밀도 높은 시간은 그 자체로 좋았지만, 그런 순간에 기대 외로움을 지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어떤 날에는 서울에 살 때 데리고 있던 친구 고양이들의 따스함까지도 그리웠다. 사람의 체온보다 높은 동물의 온도가 주는 위안과 안정감은 굉장히 큰 것이었구나. 하지만 타지의 불안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쉽사리 반려 동물을 들일 수는 없었다. 사람도, 동물도, 무엇도 없었던 나는 식물을 찾게 되었다. 나는 아보카도에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아보카도를 ‘음식’이 아닌 ‘식물’로 처음 접한 건 전 직장에서 따르던 한 선배를 통해서였다. 수영 선수 같은 훌륭한 피지컬을 지녔지만, 운동을 이틀 연속하면 그 다음날 앓아눕는 사람. 운전을 기가 막히게 못하지만 빨간색 스포츠카를 고집하는 사람. 하나하나 보면 굉장히 예쁜 옷을 한꺼번에 입어 괴이한 패션으로 안타까움을 자아내던 사람. 회사 화분의 흙이 좋은 흙인 것 같다며 매일 조금씩 종이컵에 담아 가다가 들켰을 때 절대 말하면 안 된다고 약속하게 하던 사람. 그런 사람이 아보카도를 키운다고 했을 때, 뭔가 이상하고 멋져 보였다. 어느 날 (아마도 회사에서 훔쳐간 흙으로) 선배는 키우던 아보카도를 회사에 가져왔고 나는 싱그러운 모습에 홀딱 반했다. 아보카도는 정말 멋진 식물이구나. 아보카도를 저렇게 멋지게 키울 수 있구나.
954킬로미터와 1년이라는 시간이 떨어진 곳에서, 이제는 내가 아보카도에 싹을 틔우고 있었다. 외로움을 쫓아내고 애정을 쏟을 대상을 찾기 위해. 아보카도에 싹을 틔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꽤 많은 아보카도를 (다양한 방식으로) 먹었고 거기서 나온 씨앗을 모았다. 몇 가지 방법을 써보았다. 정석대로 이쑤시개를 양 옆에 꽂아 유리컵에 걸쳐 더 넓은 쪽의 반쪽만 물에 잠기게 하는 방식. 적당히 낮은 접시에 물을 채우고 아보카도를 네 귀퉁이에 하나씩 반만 담가놓는 방식. 그리고 바로 흙에 심고 물을 듬뿍 주는 방식. 일주일이 지나니 매끈하던 아보카도 씨앗에 하나둘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무언가 좋은 조짐이 있을 징조일까. 그런데 일주일, 이주일이 지나도 그 이상의 변화가 없었다. 물이 증발하면 갈아주고, 미끈한 것이 낀 씨앗은 닦아주었다. 어떤 씨앗들은 그냥 쭈글쭈글하게 쪼그라들어 버렸다. 그런 건 잘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가망이 없는 씨앗들이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째가 되었다. 몇몇 씨앗들은 금이 가 있던 곳이 점점 더 넓게 벌어졌다. 그리고 어느 날, 정말 딱 하룻밤 사이에, 연두색 이파리가 쑤욱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여덟, 아홉 개 중 단 하나의 씨앗에서 싹이 텄다. 그건 꼭 작은 기적 같았다.
호두알 만한 둥그런 씨앗 속에서 싹을 틔우려고 오랜 기간 힘을 모아 와서인지, 씨앗에서 새싹이 되기까지의 긴 시간이 무색하게 새싹은 모습을 드러낸 뒤로는 무럭무럭 잘도 자랐다. 그간 어둠 속에서 기다려온 시간을 보상받겠다는 듯, 옮겨 심어준 손바닥 만한 화분을 가득 채우겠다는 의지로. 매일 달라지는 그 모습에, 연두색에서 점점 짙은 녹색으로 변해가는 강인한 생명력에 감탄했다. 나는 매일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고, 스마트폰 속 <아보카도> 앨범은 내 자랑거리가 되었다. 아보카도가 점점 커가는 모습이 한눈에 보이는 사진 앨범을 나는 자주 들여다보았다. 첫 번째 화분과 두 번째 화분을 쉽게 재끼고, 작은 나무에 걸맞은 커다랗고 무거운 화분에 아보카도를 옮겨 심을 때 즈음에는 나의 중국어도 꽤나 늘어 있었다. 회사에서 마음이 통하는 동료를 만났고, 중국어 학원에서는 의지할 만한 친구들이 생겼다. 자주 가는 밥집이 생겼고, 좋아하는 산책 코스가 생겼다. 차, 오토바이, 사람이 뒤엉킨 거리에서 거리낌 없이 자전거를 타고 역주행을 시도하는 사람이 되었고, 새치기하는 사람에게 줄 서라고 한 톤 높여 소리칠 줄도 알았다. 베이징의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한국에서 친구들이 방문하면 꽤나 능숙하게 가이드를 하고 로컬만이 알만한 장소들을 소개해줄 수 있게 되었을 무렵, 나의 베이징 생활은 끝이 나게 되었다. 사드로 안 좋아진 한-중 경제 관계가 지속되면서 한국인인 내가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 베이징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기로 했다. 처음 갈 때에는 늦봄의 향긋한 녹음이 날 반겼는데, 떠날 즈음엔 가을의 농후하게 무르익은 기운이 가지 말라고 붙잡는 것만 같았다. 떠나려고 하니 하루하루가 어찌나 아름답고 또 아쉽던지. 나는 벌써 베이징이 그리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그리운 것은 베이징의 푸르른 나무들이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아쉬운 나무는 바로 집에 자리 잡은 아보카도 나무였다. 애정을 들여 키워낸, 내게 위안과 힘을 주었던 아보카도 나무를 두고 가려니 마음 한쪽이 텅 비는 것 같았다. 식물 하나에 무슨 유난이냐 하겠지만, 정말로 그랬다. 나는 농림축산부 사이트에 접속해서 식물을 가지고 입국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찾아보았다.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는 사이트를 읽고 또 읽었지만, 결론은, 없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방법은 가장 믿을만한 친구에게 아보카도를 입양 보내는 것.
“중요한 부탁이 하나 있어. 너 나의 하이즈(중국어로 아기라는 뜻)를 좀 맡아줄래?” 뜬금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묻자 친구는 놀라서 눈이 똥그래졌다. 하.. 하이즈? 응, 내 하이즈. 나는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친구는 안도한 표정으로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내리며 말했다. 좋아. 네 하이즈, 내가 맡아줄게. 강아지 둘, 고양이 둘과 살면서 야근을 하는 날이면 저녁 시간에 집에서 강아지를 산책하고 오고,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을 때 안절부절못하던 모습을 봤던지라 책임감 있는 친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주말이면 집에 틀어박혀 식물에 물을 주고 차를 마시는 아주 전형적인 집돌이였다. 나는 알겠다고 답한 친구에게 몇 번이나 다시 약속을 받아냈다. 아보카도 돌보기는 전혀 어렵지 않아. 햇빛이 많이 드는 곳에 두고 자주 창문을 열어 바람을 쐬어주고, 겉흙이 마르거나 잎이 축 처지면 물을 주면 돼. 친절하고 쉬운 설명도 덧붙였다. 잘 부탁해 친구야.
한국에 돌아온 지 일 년 반. 베이징에서 산 기간과 어느덧 비슷해졌다. 베이징에서 만난 친구들과는 여전히 연락을 주고받는다. 심심하면 메시지를 보내고 가끔은 영상통화를 한다. 시간이 지나도 수다를 떨 내용은 많고도 많은데, 점점 눈에 띄게 짧아지는 내 중국어에 하고 싶은 말의 절반도 못하고는 한다. 그저 함박웃음과 들뜬 목소리로 그리움을 전할 뿐. 나는 가끔 나의 “하이즈”의 안부를 묻는데, 늘 목소리가 크고 당당한 친구는 그럴 때면 못 들은 척 말을 돌려버린다. 아무래도 나의 하이즈는 무사하지 못한 것 같다. 아무리 동식물을 잘 키우는 책임감 있는 친구라도, 외로운 사람이 쏟았던 애정에는 못 미치나 보다. 아무래도 내가 베이징을 떠나오며, 아보카도도 그곳을 함께 떠나기로 했나 보다. 베이징 생활은 짧고 찬란한 실패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서울을 떠날 때 베이징을 시작으로 점점 서쪽으로 갈 계획이었는데 백도를 해서 다시 서울에 자리 잡고 있으므로. 하지만 떠날 때는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던 서울이 요즘에는 좋다. 그러니까 베이징을 가기 전의 서울과 베이징을 다녀온 후의 서울은 내게 전혀 다른 서울이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것이 분명한 조경사가 공들여 가꾼 길가의 색색깔 튤립들 때문인지, 출근길에 마스크를 뚫고 훅 들어오는 라일락 향기 때문인지, 목련과 벚꽃이 지고 그 자리에 돋아나는 녹색잎들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도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와서인지 모르겠다.
외로움은 나 외에 애정을 쏟은 대상이 없을 때 자리 잡는 것인가 보다. 곁에 사람이, 동물이, 그리고 식물이 있는 사람은 외로움의 손길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북경에 두고 온 “하이즈”는 작별을 했지만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맞은편에도 아주 멋지게 자랄 것 같은 허벅지 높이의 아보카도 어린이가 녹색을 뽐내고 있다. 그리고 조금 더 가까이에는 다섯 개의 아보카도 씨앗이 다섯 개의 가능성을 가지고 물에 잠긴 채 꿈을 꾸고 있다. 아보카도를 키운다고 하면 많이들 묻는다. “열매는 언제 열려요?” 그럼 나는 웃으며 답한다. 20년 뒤쯤? 한참 걸려요, 나무가 되어야 하니까. 열 개의 씨앗이 꿈을 꾸면 두세 개가 싹을 틔우고 또 그 싹들 중 어쩌면, 아주 운이 좋으면 하나 정도가 나무가 된다. 나무가 되어서 열매가 열리기까지는 어떤 시간과 어려움이 있는지 아직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어떤 나무는 분명 열매를 맺을 거다. 내가 먹은 아보카도가 그걸 증명하고 있으니까. 기꺼이 지켜보고 싶은 시간이다. 그 시간은 분명 너무나도 푸르르고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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