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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와 회색의 영역적은 글 2020. 11. 8. 23:43
<데드 돈 다이>를 보러 혼자 영화관에 갔다. 요즘 알아가고 있는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영화 보러 왔어요. 무슨 영화요? <데드 돈 다이>라고, 혹시 들어보셨어요? 들어본 적 없는데, 어떤 영화냐고 물어보는 그에게 뭐라고 답을 할까 잠시 고민했다. 짐 자무쉬 감독의 신작인데 내가 그 감독의 독특한 영화 세계를 흥미로워하는 편이라는 점, 남자 주인공 역을 맡은 아담 드라이버를 좋아한다는 사실, 아담 드라이버 섹시하지 않냐고 했다가 친구들에게 비웃음을 산 이야기, 짐 자무쉬와 아담 드라이버가 처음으로 함께 작업한 자무쉬 감독의 전작 <패터슨>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주 긴 말줄임표를 생략하고 대신 이렇게 답했다. 좀비 영화인데요, 좀비 영화 같지 않고 되게 웃겨요.
지난 7월에는 이별을 했다. 이별한 시기가 7월의 어느 날이었던 것이 아니라, 7월 내내 이별을 했다. 7월에 한 일이라고는 이별밖에 없는 것 같기도 하다. 7월 초에 시작된 갈등은 몇 주간 몇 번의 싸움으로 이어졌다가, 약 열흘간의 침묵이 되었다가 마침내 7월 말, 연애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렇게 적으면 마치 점차적인 이별이었던 것 같지만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기간은 뭐라고 정의하기 힘든 애매한 시간이었다. 연애를 하는 것도 이별을 한 것도 아닌. 이 연애가 아직 살아있는지 아닌지 모르겠는. 나는 애인이 아이폰에 깔아주었던 기념일 카운터 앱에 그 기간을 '좀비'라고 적어 넣었었다. 일주일 정도 후에 그 앱은 내 폰에서 삭제되었다.
영화 <데드 돈 다이>의 주인공은 미국 남부 작은 마을의 경찰관 세 명이다. 평화롭고 무료해 보이는 마을에서 이들이 맡는 사건은 기르는 닭을 노숙자가 훔친 것 같다는 신고를 접수하거나, 동네의 주정꾼을 유치장에 하룻밤 가둬두는 정도다. 그러한 마을에 기후 변화로 인해 이상한 기운이 퍼지고, 죽었던 이들이 무덤에서 깨어나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작은 마을에 나타난 좀비의 특징은 그들이 낯설지 않다는 점이다. 경찰관들은 다가오는 좀비들을 보며 말한다. 쟤네는 작년에 교통사고로 죽은 형제잖아,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밥, 너구나! 할머니!(울부짖음) 좀비들은 이웃이었고, 친구였고, 가족이었던 이들이다. 이들을 보며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워하는 경찰관 모리슨(클로에 세비니)에 반해 경찰관 피터슨(아담 드라이버)은 거침없이 좀비들을 처치하며 말한다. 저들은 우리가 알던 사람들이 아니야. 저들은 살아 있는 게 아니야. 죽지 않은 거야. 언데드야.
"죽다"와 반대말인 "산다" 사이에 "죽지 않은"을 만들어내는 회색 영역의 존재들. 사람이었지만 더 이상 사람이 아닌 존재들. 좀비는 이상한 괴물들이다. 이러한 애매한 존재의 좀비들처럼 영화는 밤과 낮의 경계도 지워버렸다. 하루는 밤까지 백야가 지속되고, 하루는 대낮인데 깜깜하고, 대체로 어스름한 빛이 머물러 시간을 알 수 없는 시간에서 진행되었다. 좀비 영화 같지 않은 좀비 영화라는 말처럼 어딘가 애매했다. 나는 확실하고 명확한 공포와 스릴을 주는 대신 우스꽝스럽고 능청한 유머를 던지는 이 애매한 좀비 영화를 보면서 피식피식 웃다가 갑자기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갑자기 밀려오는 슬픔에 누가 보지도 않는데 눈치를 살피며 호흡을 골랐다. “죽지 않은”이 만들어낸 회색의 영역이 갑자기 너무 광활하고 넓게 느껴졌다. 회색의 존재는 흥미롭지만 불안하다. 나는 잠시 회색의 불안함에 빠져 허우적대는 상상을 했다. 누군가 와서 명확한 선을 그려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애매함이 공포스러웠다.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가기를 멍하니 기다렸다가 영화관을 나왔다. 영화와 영화가 준 이상한 감정을 곱씹으며 알아가는 중인 그 사람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좀비가 무섭지 않고 어설프고 우스꽝스러워서 오히려 좀비라는 존재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는 점,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만이 웃을 수 있는 유머가 많았다는 사실, 감독이 딱히 큰 야심 없이 즐거우려고 만든 영화 같다는 감상, 아담 드라이버는 역시 멋지며 자무쉬 영화에 굉장히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 유쾌한 영화였는데 보다가 갑자기 울컥했고 조금 우울해졌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아주 많은 말 대신 이렇게 답했다. 되게 웃겼어요, 좀비 영화를 보고 이렇게 웃기는 처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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